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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의 공연을 보기 위해 창원에서 대구의 공연장까지 먼길을 온 강혜린씨. 공연이 끝난 후 아이처럼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
'떨림' '설렘' 같은 단어가 어울리는 순간, 바로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것을 할 때일 것이다. 물론 그 좋아하는 것에는 경계도, 장르적 제약도 없다. 나를 빠져들게 한 어떤 요소, 스타일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삶의 활력소이자 무한한 기쁨이 된다.
지난달, 많은 이들이 떨리는 시간을 보낸 두 곳의 공간을 찾아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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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피아니스트 공연에 '아이 같은 미소'
지난달 15일 대구 달서아트센터 공연장. 이날 저녁 공연장에서는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공연 시작 전부터 관객의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다닐 트리포노프의 내한 공연은 9년 만이었다. 그를 좋아하는 팬에게는 수년을 기다려온 공연이었다. 몇 해 전 대구에서 열릴 것으로 예정됐던 다닐 트리포노프의 공연이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된 적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연주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전국의 팬들이 대구를 찾았다.
9년 만에 내한공연, 전국서 찾은 관객
손꼽아 기다린 실물 연주 '감동 두배'
청년부터 어르신까지 모두 기쁜 표정
공연이 끝나고 피아니스트가 관객에게 사인을 해주는 시간이 마련됐다. 많은 관객은 두 시간이 넘는 공연이 끝난 후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공연장 안에 긴 줄을 섰다. 자신이 사랑하는 피아니스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젊은 청년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들까지 모두가 기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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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대구 달서아트센터 공연장. 관객들이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의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
공연을 보기 위해 창원에서 대구까지 왔다는 강혜린씨는 "다닐 트리포노프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음악으로 표현해 내는 사람이다. 오늘 공연도 그랬다. 자연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서글프기도 하고, 때로는 관객을 위로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며 "'음악이 눈에 보인다'는 느낌을 받게 해주는 피아니스트"라고 했다.
이날 공연 중 '어떤 레퍼토리가 가장 좋았냐'는 질문에 그는 '라벨(밤의 가스파르)'을 꼽았다. 강씨는 "흔히들 어렵다고 하는 라벨의 곡, 여러 이질적인 분위기가 모여 있는 그 곡을 너무 잘 표현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 노부부가 다닐 트리포노프에게 사인을 받으면서 무언가를 속삭이는 모습도 보였다. 대구의 70대 부부는 현재 전 세계의 촉망받는 피아니스트 중 다닐 트리포노프를 특히 좋아해서 공연장을 찾았다고 했다. 그들은 "예전에 스위스 루체른에서 다닐을 만나 사인을 받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잠깐 했다"며 남다른 인연을 전했다. 부부 중 남편은 슈만(판타지)이, 부인은 라벨이 이날 공연 중 가장 좋았다고 말하며 미소를 안고 공연장을 떠났다.
이번 공연을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렸다는 한 30대 직장인은 "4년 전쯤 다닐 트리포노프가 누군지 잘 모를 때였는데, 출근길 라디오에서 우연히 그가 연주한 리스트의 곡을 듣고 그야말로 '입덕(어떤 분야나 사람을 열성적으로 좋아하기 시작함)'하게 됐다. '어떻게 저걸 저렇게 칠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 직장생활에 많이 지치고 권태로운 상태에서 오랜만에 느껴본 '떨림'이었다"며 "그때부터 유튜브로 다닐 트리포노프의 연주 영상을 찾아들었는데, 꼭 한번 실제로 연주하는 것을 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오늘 공연 중 모차르트(환상곡)를 잊지 못할 것 같다. 슬프고 아름답게 그만의 방식으로 모차르트를 잘 표현해 낸 것 같다"며 "다닐 트리포노프와 동년배인 것이 기쁘다. 오랫동안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지 않나"라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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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중구에 위치한 위시카페 한쪽에 가수 임영웅과 관련된 공간이 마련돼 있다. |
#2
대구시 중구에 위치한 대구콘서트하우스 입구에서 만날 수 있는 '위시카페'. 요즘 이곳이 가수 임영웅의 팬들이 자주 찾는 아지트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지난달 찾아간 위시카페는 듣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문을 열면 입구에서 임영웅의 여러 굿즈가 반기고 있고, 창문에는 임영웅의 포스터가 가득했다.
카페 한쪽에는 아예 '임영웅 존'이 마련돼 있었다. 대구를 대표하는 클래식 공연장 건물의 카페에 새로운 분위기가 입혀지기 시작한 것은 몇 해 전부터였다. 위시카페는 임영웅을 좋아한 사장님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임영웅 팬들이 모이는 공간으로 변모했다고 한다. 주문한 커피를 마시는 내내 임영웅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카페는 낮에는 보통 임영웅의 노래를 틀고, 저녁에는 클래식을 튼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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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중구 위시카페 입구에 있는 임영웅 굿즈 전시 공간. 카페 사장과 손님들이 하나둘씩 모은 임영웅 관련 기념품이 가득하다. |
임영웅과 만남의 공간
카페 사장이 팬…입소문 나며 팬 몰려
커피 마시고 노래 감상…굿즈도 전시
성금 기부·빵나눔 등 함께 봉사 활동
한 중년 여성이 딸과 함께 카페를 찾았다. 그는 즐거운 표정으로 카페 곳곳을 둘러보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때만큼은 자신의 딸보다도 더 어린 소녀로 돌아간 듯했다.
굿즈가 전시된 곳 바로 옆 테이블에서는 임영웅의 팬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마다 소지품에서 진한 임영웅 '덕후(특정 분야에 심취한 마니아)'의 향기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의 사진을 바라봤다.
대구를 비롯해 강원도, 서울, 부산, 포항, 경산 등 각지에서 온 팬들은 카페에서 임영웅과 관련된 정보를 공유하거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고.
위시카페의 배정희 사장은 "3년 전쯤 갑자기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했을 때 콘서트하우스의 공연이 많이 취소되고, 암흑기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카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며 "그때 내가 평소 좋아하던 임영웅의 노래를 틀고 굿즈들을 카페에 약간씩 진열했다. 그렇게 나도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게 입소문이 나서 우연한 기회에 이곳이 임영웅 팬들의 휴식처가 된 것 같다. 팬들이 기증한 임영웅 굿즈도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SNS를 타고 더 유명해졌다"고 했다.
배 사장은 "처음에는 팬들이 거의 혼자서 카페를 찾았는데, 이곳에서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언니, 동생'이 된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카페에 모인 임영웅의 팬들은 함께 봉사활동에 나서며 선한 영향력을 실천하기도 했다. 2021년 대구 중구청에 성금을 기부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사랑의 빵나눔' 봉사도 펼쳤다. 올해도 다양한 봉사활동을 계획 중이라고 했다.
카페 앞에서 만난 임영웅의 한 50대 팬은 "따뜻한 목소리와 노래 실력 때문에 임영웅을 좋아하게 됐다"며 "다른 사람들 눈치 볼 것도 없다. 너무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내가 좋아하고 가슴 뛰는 일을 즐겨보는 게 인생의 행복인 것 같다"고 말했다.
글·사진=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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