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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회장이 타고 간 비행기 나카지마 AT-2. |
비행기 프로펠러가 돌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서서히 대구국제공항 활주로에 진입하더니 이내 날기 시작했다.
이병철이 만주를 향해 비행기에 오른 것은 1937년 여름이었다. 그가 탄 나카지마 AT-2 비행기는 정원이 단 열 명인 여객기였다. 승객은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만주 일본군의 고위장성과 만주의 일본기업에 근무하는 간부들이었다. 조선인은 자신밖에 없었다.
대구에 국제공항이 설치된 것은 1937년 1월31일이다. 즉 일본항공수송이 일본 도쿄에서 출발, 오사카, 후쿠오카를 경유해서 대구에 취항한 것이었다. 이어 대구에서 남만주의 대련, 봉천, 신경까지의 직항 노선이 설치되었고, 늘어나는 여객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일본항공 수송을 대일본항공으로 확대 개편했다.
그가 탄 비행기는 서울을 거쳐 평양을 지나 신의주 그리고 중국 만주의 다롄공항에 도착할 것이고 거기서 다시 봉천(오늘날의 심양), 신경(장춘)으로 갈 것이었다.
그의 나이 27세. 혈기방장한 나이였으나 이미 그는 경남 일대에서 200만평이라는 거대한 농토를 소유했다가 대실패를 맛보았다. 마산 식산은행으로부터 토지 구입 대금을 빌려 투자를 했으나 중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은행 측이 모든 대출금을 회수하는 바람에 빚을 갚고 나니 수중에 현금 20만원, 마산정미소와 양조장 하나만 간신히 건졌다. 그는 시장이 큰 경북, 대구를 발판으로 하되 국제 무역을 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만주로 가자." 이병철은 이른바 '만주 특수'가 일고 있다는 내용을 일본 신문을 통해 알고 있었다. 땅 투기로 쫄딱 망한 그로서는 중일전쟁 특별 수요로 다시 한번 재기할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아이템을 찾을 것인가, 그게 이번 여행의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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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병철(왼쪽) 삼성그룹 창업주와 故 이건희 회장. 〈영남일보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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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국무원 |
◆만주국이라는 괴물
그가 탄 비행기는 1박2일이 걸려 중국의 항구도시 다롄에 도착했다. 중간에 평양공항에서 내려 하루 잤고, 그 다음 날 비행기는 만주를 향해 날았다.
일본은 1932년, 마지막 황제로 불리는 부의를 만주국 허수아비 황제로 앉히고 이른바 만주국을 건국했다. 만주국의 목표는 단 하나, 만주 일대를 중공업화해 병참기지로 삼고, 군수산업이 가동되면 중국 전체, 나아가서는 동남아 일대를 모두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막대한 투자가 필요했다.
1937년 당시 일본의 1년 예산은 7천336억엔이었는데 그해에 집행된 군사비는 국가 예산의 80%였고,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만주 건설에는 일본건설업계 2위의 오바시 건설, 3위의 카지마 건설 등이 참여했고 미쓰비시 중공업이나 히타치 제작소 등 굴지의 엔지니어링 회사들이 들어갔다.
그들의 최우선 목표는 길이 1천㎞ 넘는 남만주철도를 건설하는 것이고, 700개가 넘는 철강기업의 완성, 그 이후 각종 병장기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동화자동차공업주식회사(자동차와 트럭의 제조), 하얼빈의 만주 비행기 제조 주식회사(엔진과 항공기 제조), 남부식 자동권총 제조를 위한 봉천병기창, 만주공작기계, 만주항공주식회사, 만주중앙은행 등이 들어갔다.
일본 정부는 만주에 진출한 군인과 민간사업자 등을 위한 군수품 조달을 위해 만주·몽고이민단을 모집, 2만명 넘는 일본인이 만주로 몰려들었다.
그 중심도시는 교통의 요지 봉천과 다롄, 장춘 주변이었다. 거기에는 200만명이 넘는 일본인이 살고 있었는데 필요한 것이 석유·휘발유 석탄·콩·쌀, 채소, 과일, 술·가공식품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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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몽개척단 모집 광고지 |
◆장춘, 신경에서 시장을 조사하다
그가 내린 곳은 신경공항, 지금의 길림성 장춘이다.
장춘의 시가는 놀라웠다. 8차선 대로가 쭉쭉 뻗어있고, 거대한 고층건물이 줄지어 있고, 시내 중심에 거대한 관동군 사령부가 있었다. 76만명 관동군의 본부이다. 장교들의 가족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늘어난다. '만주에 가면 돈이 있다'는 소식에 일본의 민간기업들도 대거 만주로 몰려왔다.
시내 한복판에 일본의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도 들어와 있었다. 그 당시 미나카이 백화점은 한국의 부산, 진주, 서울 등지에 무려 12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급팽창한 만주국. 그 인구는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등이 모여 3천393만명. 돈이 있는 일본인 인구만 200만명이라는 거대한 시장. 인구는 급팽창하는데 물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만주에 대한 소식은 조선의 기업인들도 알고 있었다. 경성방직의 김연수 사장과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사장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만주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과 함께 만주 및 북중국 지역에 진출한 경성방직은 거기에 방직공장을 짓고 일괄 생산 체제를 완성했다. 즉 70만명의 군인이 입을 군복과 메리야스, 양말, 모자 등과 대기업 종사자 100만명의 의복 등 납품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삼양사는 중국에서 닥치는 대로 논밭, 과일농장을 사들이고 있었다. 만주의 일본인들에게 쌀과 부식, 과일 등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1941년 무렵이 되면 국내의 대기업으로 성장했고, 화신그룹의 박흥식도 '만주 특수'에 편승, 무역업에 진출해서 국내 최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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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
이병철은 신경 시내의 백산상회를 찾아갔다. 백산상회는 경주 최부자와 경남 의령 부림면 출신의 안희제가 차린 무역회사이다. 안희제는 같은 동향일 뿐 아니라, 이병철 집안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거기서 이병철은 만주시장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리고 다시 봉천시로 내려가서 시장 조사를 했다. 그리고 결론은 사과, 밤, 건어물이 제일 유망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200만명이 넘는 만주의 일본인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건어물과 밤 그리고 사과였다.
건어물의 경우, 신경이나 봉천은 바다가 멀었고 일본인들은 청결하지 않은 중국산보다는 조선의 건어물을 선호했다. 그렇다면 대구와 가까운 포항의 건어물을 내다 팔면 된다는 판단이 섰고, 밤의 경우도 만주지역에서는 거의 생산이 되지 않았다. 사과의 경우는 랴오닝성이 중국 최대의 사과 산지였지만 대구 사과와는 맛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아, 그렇다면…. 대구에 무역회사를 열어 수출 품목을 수집해서 만주에 내다 팔자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렇게 해서 대구 중구 인교동에 삼성상회가 탄생한다.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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