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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드라마 속 이른바 '복수 판타지'는 꾸준히 관심과 사랑을 받아온 소재다. |
너무 빠르고, 바쁜 세상입니다.
반복되는 일상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또 매일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와 뉴스, 이슈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형식과 경계를 넘어서면 무엇이 보일까요.
주말에는 그 너머로 한번 가봐도 되지 않을까요. 저 너머에 절망이 있든, 희망이 있든, 혹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눈치 볼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말적 허용'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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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웬즈데이'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
여기 한 여학생이 있다. 검은 옷을 입고 시니컬한 표정을 한 그 여학생의 이름은 웬즈데이. 웬즈데이는 학교에서 남동생이 다른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웬즈데이는 남동생을 괴롭힌 학생들이 있는 수영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는 수영장에다 '물고기'를 풀어 버린다. 물속에 있던 학생들은 혼쭐이 난다. 그 물고기는 바로 '피라냐'였다.
다소 잔인한 장면이긴 하지만, 그게 웬즈데이식 복수였다. 그녀의 복수는 이렇듯 즉각적이고 직설적이다. 물론 이 사건으로 웬즈데이는 퇴학을 당하게 되지만.
팀 버튼 감독이 연출한 드라마 '웬즈데이' 속 한 장면이다.
현실에서 피라냐를 이용한 복수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현실 세계에서 그런 원초적인 방법을 썼다가는 평생 뒷감당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복수의 대상에게 '똥물 한 바가지' '쓰레기 한 봉지'라도 잘못 퍼부었다가는 큰일 나는 세상 아닌가.
남동생 괴롭힌 아이들이 있는
수영장에 피라냐 풀어 혼쭐
학교폭력에 몸·영혼 파괴
가해자에 인생 걸고 복수 시작
'웬즈데이' '더 글로리' 인기
가해자가 더 잘 살아가는 사회
여러유형 피해 상당수는 미해결
TV·스크린 속에서 대리 만족
드라마 혹은 영화니까 가능한 '판타지'다. 판타지 같은 복수는 여러 작품에서 주된 주제 혹은 소재로 활용돼 왔다.
복수의 형태는 폭력적이기도, 그로테스크하기도, 신파적이기도, 때로는 코믹하기도 하다. 물론 복수에 공짜는 없다. '가해자를 벌하기 위해 내가 또 다른 가해를 해야 할지 모른다' '복수를 하다 내 삶이 망가질 수 있다'는 고통스러운 딜레마를 마주해야 한다. 그러나 작품 속 인물들은 거침이 없고,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국내 영화 중 대표적인 복수극을 꼽자면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가 있다. 이 영화에서도 '복수'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다.
가장 최근에 이슈가 된 작품으로는 송혜교 주연의 드라마 '더 글로리'가 있다. 복수를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로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학교폭력으로 몸도, 영혼도 파괴된 주인공이 자신의 인생을 걸고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시도하는 것이 드라마의 주된 내용이다.
이 드라마가 특히 인기를 끈 이유는 유명 작가와 연출자, 연기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주인공이 어린 시절 겪어야 했던 폭력들이 오랜 시간 우리 사회 어두운 곳에서 자행돼 온 폭력의 행태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괴롭히는 '강약약강' 캐릭터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다.
그냥 보면 알록달록하고 시끌벅적하게만 보이는 미국 시트콤 '언브레이커블 키미 슈미트'에서도 복수의 한 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 사이비 교주 같은 자에게 납치돼 오랫동안 가스라이팅을 당한 인물이 '무너지지도 깨어지지도 않고' 누군가를 한 방 먹이는 모습은 상당히 통쾌하다.
왜 사람들은 '복수 판타지'에 공감하고 때로는 열광하는 것일까. 안타깝지만 판타지는 현실과의 거리가 클수록 빛난다. 즉 복수 판타지가 선전하는 이유 중 하나로 '대리만족'이 있다는 분석에 닿을 수 있다.
최근 큰 사회적 이슈가 된 학교폭력만 해도 현실은 우울하다. 한국교육개발원의 '2022년 1차 학교폭력 실태조사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대상 초·중·고등학생 약 3명 중 1명이 보호자나 학교, 관계 기관에 학교폭력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해결이 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학교폭력 피해 사실을 알린 후 도움받은 정도를 5점 만점 기준으로 조사한 결과 초등학교는 평균 3.57점, 중학교는 3.59점, 고등학교는 3.35점으로 나타났다.
피해 유형별로 '언어폭력'의 경우 '해결됐다'는 답은 41.1%에 불과했다. '해결되지 않았다'는 35.3%, '모른다'는 23.6%였다. '강요'는 27.2%, '금품갈취'는 33.0%, '신체폭력'은 28.9%, '사이버폭력'은 31.6%, '집단 따돌림'은 29.4%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학교폭력 피해 사실을 알려도 여러 유형의 피해가 '미해결'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폭력 피해 사실을 처음부터 알리지 않았다고 답한 학생들은 왜 그런 판단을 한 것일까.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라는 답이 30.4%, '스스로 해결하려고'가 21.1%였다.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더 괴롭힘을 당할 것 같아서'라는 답도 각각 17.3%, 14.0%에 달했다.
이처럼 숫자로 정리된 자료가 아니라도, '문제의 해결'은 쉽지 않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체감하고 있다. 현실은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니까 말이다.
판타지가 주는 씁쓸한 카타르시스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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