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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살로메 (소설가) |
소셜 미디어마다 봄 사진들이 올라온다. 산행에서 만난 진달래부터 울타리에 핀 개나리까지 이른 봄꽃의 향연이다. 여염집 화분에서 건져 올린 샛노란 꽃 사진이 카톡에 뜬다. 성질 급한 나머지 무심코 '벌써 개나리!' 하고 댓글을 달았다. 개나리 아니고 영춘화란다. 적지 않은 나이에 처음 들어 보는 꽃 이름이다. 개나리는 잎이 넷이고 발랄하다면, 영춘화는 잎이 여섯인데 어딘지 모르게 차분하다. 봄꽃 하나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눈썰미라니. 언제봐도 주변의 문우들은 하나같이 야무진 눈썰미를 지녔다. 그게 또 부럽다.
문학적 눈썰미를 키우는 데는 사진만큼 좋은 것도 없다. 잘 못 느낄 뿐, 문학과 사진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맘에 드는 사진을 들여다보노라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파문이 인다. 지층이 흔들리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이런 현상을 롤랑 바르트는 일찍이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란 개념으로 정의했다. 스투디움은 사진에 대한 보편적 정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일몰 사진을 보고 '히야, 기막힌 풍경이구나' 단순히 이렇게 받아들였다면 이는 스투디움에 속한다. 나아가 노을 깃든 구름에서, 살아있던 뱀 대가리를 잡고 휘두르던 어릴 적 옆집 노총각을 떠올리게 된다면 이는 푼크툼에 해당한다. 스투디움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정서라면, 푼크툼은 특수하고 개별적인 요소를 파고든다. '나를 끊임없이 찔러대는 그 무엇'이 푼크툼의 세계이다. 문학을 사진에 비유한다면 이 푼크툼의 풍경을 제대로 그려내는 과정이 문학이 아닐까 싶다.
롤랑 바르트의 이 두 개념을 문학에서의 알레고리와 상징의 개념에 대입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알레고리는 어떤 보편적 정서를 끌어내기 위해 다른 것으로 빗댄 것을 말한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를 구별하기 위한 교훈으로 기능한다. 이 알레고리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교적 명확하다. 이는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 대해서 말한 스투디움의 개념에 가깝다. 반면 상징은 좀 더 다의적이고 개별적이다. 김춘수의 '꽃'은 한 가지로 해석되는 게 아니다. 독자 개별자에게 가닿아 폐부 깊숙한 '찌름'을 유발한 채 저마다의 꽃으로 재탄생된다. 롤랑 바르트식 푼크툼이 되는 것이다.
어느 시인의 문학 강연회에서였다. 인상 깊은 장면이라 몇 년이 지나도 가슴에 남아 있다. 문학의 위치는 어디인가? 열정적인 시인은 숫제 칠판에다 긴 선을 그었다. 왼쪽 끝에는 상징이란 말을 적고, 오른쪽 끝에는 알레고리란 용어를 적었다. 그러고선 문학이 자리할 지점을 선 위에 찍어보라며 청중과 오랜 눈 맞춤을 했다. 상징과 알레고리의 중간 지점이 문학인가? 어리바리하게 이런 혼란에 잠겨 있을 때, 시인은 상징 쪽 그러니까 왼쪽에 살짝 치우친 지점에다 작은 동그라미를 치고 문학이라고 표시했다. 여기서 상징은 예술로, 알레고리는 교훈으로 대체할 수 있다. 딱 맞는 말 같았다. 얼음으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명징함이 밀려왔다. 문학을 단순히 이분법으로 도식화할 수는 없겠지만 이보다 더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 싶었다.
문학은 예술이라기엔 너무 현실과 맞닿아 있고, 알레고리를 표방하기엔 보다 다층적인 의미를 추구한다. 알레고리를 넘어선 삐딱함, 그러면서도 예술 쪽 포지션을 포기하지 않는 딱 그만큼의 지점에 문학이 있다. 교훈을 일삼는 안일한 오른쪽과 예술의 경지를 넘어선 왼쪽 어디쯤서, 예술 쪽으로 슬쩍 기우는 자리에 문학이 있다. 이 문학이란 매혹적인 노동을 위해 오늘도 모자란 눈썰미를 키우는 중이다. 사진이든 실제 풍경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그저 스투디움의 정서를 지나 푼크툼의 심상이 나를 아찔하게 찔러주기를 바랄 뿐이다.
김살로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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