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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규 (전 대구시 정무부시장) |
비변사(備邊司)라는 조직이 있었다. 조선 중기 왜구와 여진의 침범이 빈번해짐에 따라 이에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해 관계 고위직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는 임시 조직이다. 합의제기관에서 논의된 사항은 의정부와 육조 그리고 해당 기관에 바로 전달되어 집행되었으므로 초기에는 효율성이 담보되는 장점이 있었다. 문제는 위기 극복을 위해 설치된 임시조직이 시간이 흐르면서 상시 조직화되고 참여하는 기관이 더해지면서 비변사 당상이 수십 명에 이르고 의사결정 과정 자체도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실질적인 논의와 토론이 이루어지기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사전에 결정된 내용을 추인하는 기관이 되었다. 드디어 세도정치기가 되면 정작 중요한 정책은 몇몇 세도가의 사랑방에서 결정되고 공식조직인 의정부와 육조는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다.
비변사 운영의 문제점을 들어 이를 없애야 한다는 논의가 이어졌지만 이 조직은 대원군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생명을 유지하였다. 힘을 가지고 있는 세도가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비변사만큼 편리한 조직이 없었다. 결정주체인 나는 뒤에 숨고 구체적인 집행과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있는 경우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비변사가 가지고 있던 문제를 오늘날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조직이 바로 기능이 변질된 위원회들이다. 위원회는 말 그대로 단독관청이 추진하기 어려운 내용을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최선의 정책대안을 만들고 이를 집행해 나가는 조직이다. 물론 대부분의 위원회는 설립목적에 맞게 제 역할을 다하고 있지만 상당수의 위원회는 당초 설립 취지에서 밝힌 것과는 다르게 정부의 책임회피와 분산 또는 시간벌기용으로 악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노사정위원회를 예로 들어보자. 매년 최저임금의 결정과정을 보면 인원수가 같은 사용자대표와 근로자대표는 극단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협의에 응하지만 결국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고 공익위원들이 제시한 안이 최종안으로 정해진다. 과연 공익위원들은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판단 아래 최적안을 제시한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공익위원 뒤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떨쳐내기 어렵다. 요즘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각종 인사추천위원회도 이런 비난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하다. 모두 비변사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전에 실세들끼리 모여 내용을 미리 조율하고 지침을 내리던 행태의 변형이다.
이런 형태의 위원회 운영은 혁파되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자문위원회를 두어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를 수렴하되 결정과 집행은 책임 있는 단독관청이 행하는 것이 사리에도 맞고 효율적이기도 하다. 국민이 정부에 힘과 권한을 부여한 이유는 미래준비와 당면 현안을 신속하고 책임감 있게 수행하라는 것이다. 공직은 권한과 명예가 주어진 반면 결정과 집행에도 책임을 지는 자리이다. 비난받기 싫고 피하고 싶은 일이라고 위원회 뒤에 숨어서 행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위원회 공화국이라는 세간의 비판도 위원회 숫자의 많음이 아니라 그 기능에 실망한 데에서 나오는 것이다. 비난의 대상이 되는 불량위원회는 중앙과 지방정부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공공기관과 민간에도 유사위원회의 형태로 똬리를 틀고 앉아 우리 사회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 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정부의 면피용 또는 여론 무마용으로 전락한 위원회는 폐지하는 게 마땅하다.
박봉규 (전 대구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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