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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
경북 영주, 예천, 개포, 용궁, 점촌, 함창, 상주, 청리, 옥산, 김천. 이 10개의 역을 하나의 선으로 이으면 경북선 철도가 된다. 일제강점기에 경북 북부지역에서 나는 석탄과 목재 수송을 목적으로 개설된 경북선은 근래 들어 이용객이 많이 감소했다. 그럼에도 현재 매일 왕복 일곱 차례 무궁화 열차가 운행된다.
속도가 세상을 이끌고 가는 때에 경북선 열차의 속도는 그야말로 아날로그적이다. 재바른 승용차와 뻥뻥 뚫린 도로에 승객을 빼앗겨 사람이 붐비지도 않는다. 예천역의 경우 한 해 매출이 1억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도 들었다. 적자 운영이 오래 지속되니 철도청의 입장에서는 경북선이 경영을 좀먹는 애물단지일 수도 있겠다.
경북선, 가파른 속도의 뒤쪽에서 봄볕을 쬐며 툇마루 끝에 앉아 계시는 할아버지 같은 철도. 이 철도의 매력은 다른 데 있다. 경북선의 위치는 한반도의 중심 뼈대를 이루는 산줄기 백두대간과 궤를 같이한다는 것이다. 영주 소백산에서 김천 황악산까지 죽령~문경새재~추풍령을 만들며 백두대간을 오른쪽에 끼고 남쪽으로 달린다. 경북선은 김천역에 도착해 백두대간을 지리산 쪽으로 떠나보내고 경부선 철도와 만난다.
또 영주에서 예천까지의 노선은 내성천 물줄기와 경북선 철도의 발길이 그대로 일치한다. 지금은 폐역이 된 어등역을 막 지나면 내성천의 모래밭과 구불구불한 흐름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영주댐이 상류를 가로막은 이후에 내성천은 시름시름 앓으며 풀밭으로 변해가는 중이지만 경북선 열차의 객석에서는 내성천의 모래톱을 조망할 수 있다. 경북선이 통과하는 구간은 급격한 산업화가 이뤄지지 않은 곳으로 1980년대 이전 우리의 농촌 풍경이 상당히 유지되고 있는 곳이다. 슬레이트 지붕을 채 걷어내지 못한 농촌의 텅 빈 가옥들, 흙벽돌로 쌓아 올린 담배건조장, 엉성하게 콘크리트 담을 둘러친 마당과 빨랫줄들….
나는 경북선 열차의 기적소리가 들리는 곳에 산다. 변변한 시계 하나 없던 시절에 밭을 매러 나갔다가 정오 무렵 지나가는 기적소리를 듣고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갔다는 곳.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허벅지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내성천을 건너 지금은 없어진 고평역으로 기차를 타러 간 적도 있다. 여름날 간이역에서 '다라이'에 찐 옥수수를 담고 와 팔던 '아지매'들은 지금 다 어디에 계실까.
세상은 점점 더 빨라지고 더 풍족해지고 더 빛나는 것들로 가득하지만 경북선 철도의 역할은 쪼그라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경북선 철도에 속도가 빠른 KTX가 들어올 필요는 없다. 경북선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느리게 가는 열차 노선으로 만들면 어떨까. 현재 영주에서 김천까지는 2시간15분이 소요된다. 적어도 주말에 왕복 1회 정도는 모든 간이역에 정차하는 느린 열차를 배치해 보면 어떨까. 간이역 주변에 가벼운 트레킹을 할 수 있도록 코스를 개발하고 지역의 관광지와 '맛집'을 소개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원래 있던 것을 뜯어고치고 새로 높이 세워야 신세계가 펼쳐지는 게 아니다. 조금 느려도 다정한 시간이 있다면, 조금 불편해도 아늑한 장소가 있다면, 조금 거칠어도 맛있는 음식이 있다면 거기에 행복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허무맹랑한 역발상이 난관을 뚫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행복은 속도전이 아니다.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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