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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실 체육주간부기자 |
뒤늦게 새 공부를 시작한 친구가 최근 과제를 끝낸 후 기자에게 질문 하나를 보여줬다. 자신의 공부가 부족한 것인지, 질문이 너무 어렵게 느껴져 진땀을 뺐다고 했다. 그 질문은 마치 번역기를 거친 문장처럼 어색했다. 첫 문장과 다음 문장이 모순돼 있어 어느 장단에 맞춰 답을 하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친구가 이전에 보여준 과제 질문도 비슷했으니 이것은 한 번의 무성의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문장의 완성도가 살아가는 데 크게 중요한 요소는 아닐 것이고, 기자도 완전한 문장을 쓰진 못한다. 하지만 그건 시험이었다. 화가 난 기자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귀하께서 학생들에게 낸 석줄짜리 과제를 우연히 보았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선생님께서는 그 문장이 온전히 해석이 되십니까. 문장의 예술성을 추구하며 일부러 어렵게 쓰신 겁니까. 그런데 이 과목은 예술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과목입니다. 또 논리적 모순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첫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의 우주 같은 간극 속에서 읽는 사람은 한참 동안 길을 잃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속 핵심 단어의 맞춤법이 틀린 것은 단순한 실수입니까. 질문이 오류투성이인데 어떻게 답을 하란 말입니까. 귀하의 학생 중에는 만학도도 있습니다. 늦게 배움의 길에 나선 이들이 질문을 읽고 자괴감에 빠졌을까 우려됩니다. 귀하의 학생을 대신해 전합니다. 그 질문의 답과 그에 대한 귀하의 평가는 모두 무효입니다."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다고 했더니 기겁을 했다. "선을 넘지는 말자"는 것. 자신이 조용히 있으면 그냥저냥 적당한 점수를 받고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편지 발송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부실한 질문으로 답을 요구하는, 그 웃기지도 않는 일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사실 기자가 이번 칼럼에서 쓰고 싶은 글은 따로 있었다. 얼마 전 일부 언론에서 나온 글에 대한 반박이다. 복잡한 사안에 비해 각론이 다소 부족해 보이는 그 글에 대한 내 생각을 쓰고 싶었다, 아주 신랄하게. 동료 기자에게 계획을 말했더니 "이 좁은 바닥에서 어쩌려고…"라는 걱정이 돌아왔다. '혹시 하극상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더 싸가지 없어 보이지는 않을까.' 나는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내지 못한 학생처럼 소심해졌고, 결국 계획을 포기했다.
'선'을 넘어야 진전이 있을 텐데, 번번이 그 '선' 앞에서 뒤돌아선다. 언제쯤 '선'을 넘을 수 있을까. 이것은 용기 없고 겁 많은 나 자신을 향한 질문인 동시에 내가 사는 좁은 세상을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노진실 체육주간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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