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 이집트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이집트 왕 스마일과 선왕인 사이드는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는 등 개발을 위해 많은 사업을 펼쳤다. 이에 따라 이집트는 유럽 은행에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되고, 1875년 이스마일은 수에즈 운하 지분의 사십사 프로를 영국에 매각한다.
이집트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간섭이 심해지자, 1879년에 아흐메드 우라비가 민족 운동을 일으키고 내각의 수뇌가 된다.
그러자 영국과 프랑스는 알렉산드리아에 함포를 퍼부어 이집트군을 격파시키고, 내각을 해산시킨 뒤 이스마일의 아들인 튜픽 파샤를 앉힌다.
이로써 이집트는 1914년에는 공식적으로 영국의 보호령이 된다.그러면서 통치자를 '술탄'이라고 부르는 술탄국이 된다.
1906년에는 영국군인들이 이집트 농부를 처형한 딘샤와이 마을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이집트인이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되며, 1919년 이집트 혁명이 일어난다. 그 결과 영국은 1922년 2월 22일, 이집트의 독립을 선언한다.
1947년 - 중화민국의 타이완에서 2·28 사건이 발생했다.
대만은 50년간의 일제 통치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중국 국민당이 대만을 통치하면서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었다. 중국 공산당과 국공내전 물자를 대만에서 공수하면서 물자 부족 사태가 일어났다.
이 때문에 물가가 치솟자, 민중들의 불만이 높아졌다.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 세력이 대만으로 건너와 주요 요직을 모두 차지하면서 갈등은 더욱 심화하였다.국민당 세력이 일제가 차지했던 모든 기득권을 가져가 버리자, 토착민의 반발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대만에서는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사람을 외성인이라고 부르고,대만에서 토착민을 본성인 또는 내성인이라고 불렀다. 50년간 일본의 지배 속에서 일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대만인은 모멸과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고급 관리직을 맡은 외성인의 부정부패가 극심했다. 당시 정부의 허가 없이는 담배를 판매하는 것은 불법이었다.1947년 2월 27일 타이베이에서 밀수 담배를 판매하던 노인을
단속원이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심하게 가격하여 중상을 입혔다.
지나친 단속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항의하자, 단속원이 총을 쏴 시민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2월 28일 분노한 군중들이 관청으로 몰려가 해당 공무원의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오히려 타이완 경찰이 계엄령을 선포하자, 군중은 경찰서를 습격해 경찰관을 구타해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군과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위대는 방송국을 점거하고 무기를 탈취해 정부군과 맞섰다.타이베이에서 일어난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다. 시위대는 언론의 자유와 담배를 국가가 전매하는 것을 폐지,
인권조방 등 32개 조항을 요구했다.
하지만 중국 국민당군은 대만에 상륙해 시위대의 요구를 묵살하고 잔인하게 진압했다.
10일 동안 유혈진압으로 대만 시민 약 3만 명이 죽었다. 이때의 장제스는 이이팔 사건의 주도했던 인사들을 무차별 처형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언론 통제로 2·28사건은 은폐되었고, 거론하는 것 조차 금기시되었다.
국민당은 본성인을 공산당과 친일파로 몰아 체포했다.
이때 발포된 계엄령은 38년간 계속되었고,1987년 7월 15일에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2·28사건은 수만 명의 시민들이 대량으로 학살된 사건으로,대만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1960년 - 대한민국 대구광역시에서 2·28 학생의거가 발발했다.
삼일오 대선을 앞두고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여,대구에서 일어난 학생의거이다. 2·28 의거는 이후 3·15 마산 의거와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민주당 정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유세일이 일요일이었으나, 학생들이 유세장에 못나가도록 당국이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2·28 대구 학생의거의 발단이 되었다.
1960년 2월 27일 오후 대구 동인동 ‘이대우’ 경북고등학교 학생부 위원장 집에 모인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학교 사대부고 학생 8명은 시위대를 조직했다.'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도 작성했다.
2월 28일 오후 1시 학생 800여 명이 대구 반월당을 거쳐 경상북도청으로 향하는 중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며 시위대는 커졌다.당시 경상북도지사는 학생들에게 "이놈들은 전부 공산당"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학생을 구타하는 경찰을 말리고, 학생들을 숨겼다.시위에는 1,200 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 했고, 120 여명이 경찰에 체포됐다.그러나 경찰은 시위가 확대될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했다.
운동은 고교생이 주체로 민족운동 요건을 갖춘 계획적이고,조직적인 학생 운동이었다.
2·28 운동은 사일구 혁명의 도화선이 되며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또한 한일 수교 반대와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한유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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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정
까마기자 한유정기자입니다.영상 뉴스를 주로 제작합니다. 많은 제보 부탁드립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