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0년 - 미국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학살’이 벌어졌다.
보스턴시의 부두에서 술을 마시던 노동자들과 주둔군 사이에 시비가 붙은 일이 유혈 사태로 확대된 사건이다.식민지인들이 주둔군에게 눈덩이를 던졌고, 그 눈덩이에 맞아 화가 난 군인이 식민지인들에게 총을 발사해 다섯 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인쇄물에 고액 세금을 매긴 ‘인지세법’,설탕·커피·포도주를 포함한 대부분의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기로 한 ‘설탕법’ 등으로 인한 식민지 사람들과 본국인 영국 간의 대립이 발생한 배경이 되었다.
1915년 - '조선 기독교 학교'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에 의해 설립되었다.
1885년 미북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가 정동 32번지에서 아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86년에는 언더우드 학당 개설 예배를 거행하고, 초대 학당장으로 언더우드가 취임했다.
1891년에는 예수교 학당으로 개명하고, 5년제로 운영했다. 1905년 교명을 경신(儆新)이라 바꾸고, 일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1915년 4월 경신학교 대학부(연희전문학교의 모체)를 설립하면서,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대학교, 연희전문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1920년 - 조선일보가 창간되었다.
조진태, 예종석 등 친일 인사들이 주축이 된 친일 경제 단체였던‘대정실업친목회’에 의해 창간된 일간신문이다. 일제는 조선일보를 통해 선전을 목적으로 창간을 허가해 준 것으로 보였으나, 조선일보의 일선 기자들은 거기에 따르지 않았다.
창간 이후 6개월도 안 되는 기간 30여 차례의 기사 압수처분을 받고, 여러 번의 정간 처분을 받았다. 1920년~1924년 기간 동안 사장과 운영진이 친일파였지만, 기자들은 조선총독부에 반대하는 항일 성향이 아주 강했다.
1924년 9월에 송병준이 경영을 포기하면서, 독립운동가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이때부터 민족 신문이자 공산주의자도 논설 기자로 받아들이면서, 총독부로부터 사사건건 검열과 탄압을 받았다.
독립운동가로 명망 높았던 이상재와 안재홍도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다.
1953년 - 소련의 서기장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했다.
스탈린은 러시아의 정치가, 공산주의 혁명가, 노동운동가이자‘소비에트 연방’의 군인, 정치인, 작가, 시인, 언론인이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조지아 출신으로 정교회 성직자를 꿈꿨으나, 공산주의 혁명 사상에 감화되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공산주의 운동가·노동운동가가 되었다.
6.25 전쟁을 발발케 한 책임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강철의 대원수 혹은 그루지야의 인간 백정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 그가 정립한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전 세계의 공산주의 혁명가들에게‘스탈린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며 큰 영향을 미쳤다.
1953년 3월 1일 스탈린은 공산당 간부인 니키타 흐루쇼프 등 공산당 정치국원 4명과 만찬을 하던 도중에 쓰러졌다. 스탈린은 자신이 암살당할 것을 염려하여, 자신의 비밀별장에 데려다 달라고 명한다.
그러나 4일 만인 3월 5일 74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자료 수집 :이재원, 유준상, 노지혜 (인턴)
영상 편집 : 노지혜 (인턴)
글 : 한유정 기자 kkama@yeongnam.com

한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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