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옛 그림으로 품는 수박들

  • 김남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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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7-05  |  수정 2024-07-09 13:43  |  발행일 2024-07-05 제13면
눈으로 먹는 여름의 맛, 수박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옛 그림으로 품는 수박들
윤두서, '채과', 종이에 수묵, 30.1×24㎝, 조선 중기, 해남군 윤영선 소장

똑똑똑. 두드리면 맑은 폭포소리가 들린다. 짙은 녹색 바탕에 검은 줄이 추상화 같다. 줄무늬가 선명할수록 속은 더 붉다. 채소의 한 종이지만 사람들은 흔히 과일이라고 부른다. 쪼개면 시원한 물 냄새가 난다. 붉은 과육에 점점이 박힌 검은 씨가 물속의 피라미 같아 청량감을 선사한다. 수박은 예부터 귀한 과일이었다. 화가들은 수박을 눈으로 먹고 그림으로 남겼다. 무더운 여름날 선조들이 남긴 수박 그림을 감상하며 더위를 피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옛 그림으로 품는 수박들
신사임당, '수박과 들쥐', 종이에 채색, 34×28.3㎝, 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자연 속의 수박과 그릇 속의 수박

수박을 그린 여성 화가로 조선시대 초기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이 있다. 여성의 섬세한 눈으로 수박을 관찰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작품 '수박과 들쥐'는 한여름 대낮에 쥐가 수박 서리를 하는 장면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박 먹방'에 빠진 쥐의 모습이 천진하다. 단맛에 이끌려 주인 몰래 먹는 수박은 꿀맛이다. 유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은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몽유도원도'의 화가 안견(安堅, ?~?)에게 산수화를 배웠다고 전한다. '초충도'를 비롯해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그렸다. 여성들의 생활터전인 후원에서 키우는 채소나 가지, 수박, 꽃 등과 곤충이나 벌레, 나비들이 어울려 노니는 소소한 풍경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묘사했다. '초충도'는 간결한 구도와 섬세한 기법으로 우리의 정서를 맑게 밝혀준다.

'초충도' 8폭 병풍 중 한 폭인 '수박과 들쥐'는 푹푹 찌는 더위에 지친 들쥐 두 마리가 수박으로 영양보충을 하고 있는 광경이다. 무르익어 터지기 직전인 꿀수박을 들쥐들도 지나칠 수 없었다. 결국 수박의 아래쪽을 파헤쳐 과육을 빛의 속도로 먹는 중이다. 귀를 쫑긋 세워 인기척까지 감지한다. 서로 마주보며 망을 봐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주인이 오면 줄행랑을 칠 태세이다. 넝쿨 식물인 수박은 잎이 둥글게 휘어져 화면을 가로질렀다. 잘 익은 큰 수박과 알맞게 익은 수박, 무럭무럭 자라는 작은 수박, 넝쿨 끝에는 노란 꽃이 나비처럼 앉아 있다. 수박의 성장과정을 기록하듯이 표현했다. 밝은 녹색 잎이 선명하고, 하늘에는 붉은 나비가 수박 쪽으로 하강 중이다. 그 옆에 희고 검은 날개를 펼친 나비가 붉은 나비를 향해 날아든다. 모두가 수박의 향기에 취했다. 수박 옆에는 두 그루의 붉은 패랭이꽃이 활짝 피어 운치를 더한다. 녹색과 붉은색이 대비돼 화면이 밝고 명랑하다. 여성 특유의 세심한 관찰력이 작품을 살렸다.


윤두서 '채과' 현대적 감각 풍기는 수묵정물화
농담 조절로 과일의 질감 맑고 생생하게 표현
더위에 지친 들쥐가 수박서리하는 모습 담은
신사임당 '수박과 들쥐' 섬세한 관찰력 돋보여

정선 '서과투서' 위로 솟은 넝쿨 기운찬 느낌
고희동·이도영 '기명절지' 과일 특징 잘 살려
밝은 색채와 사실적 표현 근대회화 방향 제시
무더위 잊게 하는 선조들의 수박 그림에 눈길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기는 수박 작품도 있다. 조선시대 중기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채과(菜果)'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그릇에 큼직한 수박과 귤, 가지, 참외가 가득 담겨있는 수묵 정물화이다. 농담의 기법이 맑아 과일의 풍부한 질감이 생생하다. 커다란 수박은 강한 먹으로 덧칠했지만 붉은 속살이 내비칠 듯 기법이 투명하다. 몸통의 검은 줄무늬가 신선함을 북돋운다. 보라색 가지는 은은하게 표현했다. 참외는 골을 실감나게 그려서 먹음직스럽다. 세 개의 귤을 배치해 구도에 아기자기한 변화를 주었다. 채소와 과일의 줄기가 노출된 것으로 보아 갓 따온 것 같다. 윤두서는 작품 '채과'와 비슷하게 또 다른 정물화 '석류매지(石榴梅枝)'를 그렸다. 볼륨을 강조한 도자기 그릇에는 큰 석류를 모과와 함께 배치하고, 익어서 껍질이 벌어진 석류는 영롱한 붉은 알이 돋보이도록 처리했다. 그 사이 연두색 모과가 있다. 주황색 표면이 울퉁불퉁한 한라봉 같은 남도 과일도 있다. 밭에서 바로 공수해 온 듯 잎사귀가 싱그럽다. 여기에 활짝 핀 매화 가지를 곁들였다. 금상첨화다. 이들 수묵 정물화는 윤두서가 서양화풍의 시각을 구사한 것이어서 더 눈길을 끈다.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옛 그림으로 품는 수박들
정선, '서과투서', 비단에 채색, 30.5×20.8㎝, 간송미술관 소장

◆쥐마저 홀린 수박과 근대회화 속의 수박

조선 후기가 되면, 신사임당의 '수박과 들쥐'를 다른 버전으로 그린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서과투서(西瓜偸鼠)'가 등장한다. 화면에는 풍성한 잎 사이로 짙은 청색 수박이 중앙을 차지한다. 수박 넝쿨이 위로 올라 기운차다. 수박 주위로 점을 찍듯 풀을 묘사해 안정감을 자아낸다. 조그마한 쥐가 몇 배로 큰 수박을 파헤치며 분홍빛 물이 들 만큼 몸을 부비며 수박을 먹고 있다. 앞쪽의 쥐가 고개를 올려 망을 보는 중이다. 서로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지혜롭다. 앞에는 달개비가 쥐의 움직임을 감춰주듯 무성하게 피었다. 남색 꽃이 핀 달개비가 한여름의 열기를 식혀준다. 정선은 주로 진경산수화를 그렸는데, 특이하게도 '서과투서'와 비슷한 작품 '과전전계(瓜田田鷄)'를 남겼다. 넝쿨 식물인 오이를 그린 한여름의 풍경이다. 물기 가득 품은 연두색 오이와 참개구리가 주인공이다. 땡볕이 내리쬐는 날, 개구리가 오이 밭을 방문했다. 개구리는 오이의 큰 이파리 밑에서 더위를 식힌다. 하늘에는 나비가 비행 중이다. 붉은 패랭이꽃이 연녹색의 오이와 조화를 이룬다. 붓질이 공간에 변화를 주어 그림의 맛이 풍성하다.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옛 그림으로 품는 수박들
고희동·이도영 합작, '기명절지', 비단에 채색, 21.2×48.2㎝, 191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근대가 되면, 여러 종류의 과일이 나타난다. 고희동(高羲東, 1886~1965)과 이도영(李道榮, 1884~1933)이 합작한 '기명절지(器皿折枝)'에는 당시 유행한 과일이 소복하다. 수박과 복숭아, 산딸기, 고추, 물고기, 무 등 다양한 과일과 기물이 있어 채소가게를 연상케 한다. 화가가 좋아한 과일과 희귀한 주전자를 나열하듯 그려 놓았다. 선면(扇面)에 그려서 매끈하진 않지만 사물의 특징을 살려 그림이 화사하다. 1915년 5월에 이 그림을 완성해 스승인 안중식(安中植, 1861~1919)에게 보여 주었다. 안중식은 제자를 위해서 글 한 줄을 써 준다. "술이 오고 생선도 익었으며 순무도 맛이 알맞게 들었다. 정결한 다섯 가지 과일을 꼭꼭 씹어 먹으면 백발이 머리로 올라오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화면 오른쪽 위에 "상영풍미(觴詠風味)"라는 글이 있다. "술을 마시며 시를 노래하고 음식의 맛을 음미한다"는 뜻이다. 아마도 그들이 모임을 가진 후 작품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기명절지'에는 왼쪽과 오른쪽의 그림 기법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사실적으로 표현한 수박은 짙은 청색에 검은 줄무늬가 선명하다. 윗부분이 잘린 곳에는 검은 씨가 점점이 박혀 있다. 음영법을 사용하여 표현한 옥수수 사이로 산딸기를 배치해 놓았다. 분홍빛 복숭아가 탐스럽다. 이 부분은 서양화를 전공한 고희동의 솜씨로 보인다. 반면에 오른쪽의 주전자와 물고기, 무는 이도영의 동양화 기법을 사용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과 전통화를 계승한 이도영의 희귀한 컬래버 작품이다. 색채가 밝고 사실적인 사물의 표현은 근대화로 가는 순수회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 같다.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옛 그림으로 품는 수박들
김남희 화가

올해는 무더위가 일주일이나 빨리 찾아왔다. 몸의 리듬이 깨져 허우적거린다. 잘 생긴 수박 한 통을 사서 앞에 두었다. 쩍 갈라지는 수박 소리가 시원하다. 먹기 전에 나도 신사임당처럼 수박 그림을 그렸다. 짙은 녹색 잎이 무성한 고목을 크게 그리고, 그 아래 수박 한통과 붉은 속살에 검은 씨가 박힌 수박 반쪽을 옆에 두었다. 바람이 일렁이는 그늘에 앉아 수박을 먹는다. 그림 속을 거닐며 더위를 식힌다.

김남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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