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종규 작 |
제과 기능시험 최종 실기 날, 연은 차분히 레시피를 밟아나갔다. 밀가루 반죽에 불과했던 질료가 점차 웃자란 나무를 닮은 케이크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다만 진짜라기엔 아직 겉면이 번번했다. 제누와즈의 보드라운 살결에 크림을 얇게 발라 바탕면을 칠했다. 덧댄 크림 위로 가나슈를 붓자 초콜릿 방울이 수액처럼 방울져 흘러내렸다. 연은 제빵 칼을 들고 나무의 옆면을 긁어냈다. 수피의 질감을 잡아나가며 흘긋 감독관들의 눈치를 살폈다. 나무에 상흔이 새겨질 때마다 몇몇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볼펜이 클립보드에서 만족스럽게 미끄러졌다.
연은 다시금 작업에 골몰했다. 흔적이 빽빽함에도 쉽사리 칼을 놓을 수 없었다. 하나만 더, 그 한 줄이 당락을 결정할 듯했다. 칼이 들어간 자리마다 초콜릿 코팅이 벗겨져 바스러졌다. 별안간 그 부스러기를 주워 삼키고픈 충동이 몰려왔다. 시험장에 일찍 도착하여 준비를 마치기 위해 아침을 거른 탓이었을까. 설상가상으로 눈꺼풀도 점점 무거워졌다. 전날 밤 긴장하여 잠을 설친 여파가 뒤늦게 밀려오는 중이었다. 오븐에서 흘러나온 바닐라 향이 그를 포근히 감싸 안았다. 조금씩 몸이 가벼워지며 발이 허공으로 둥둥 떠오를 듯했다.
그때, 쨍, 금속성의 소음이 고막을 강타했다. 순식간에 잠이 달아나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시선은 텅 빈 오른손을 지나쳐 조리대 위의 왼손으로 향했다. 칼날이 스쳐 쩍 갈라진 왼손에서 검은 크림이 뚝뚝 흘러내렸다. 잘린 손등은 그 단면을, 무채색의 시트와 틈새마다 자리 잡은 묽은 크림을 선명히 내보였다.
"케이크네요."
감독관뿐만 아니라 수험생들까지 그렇게 수군거렸다. 연은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다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상처를 봉합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빵칼에 잘린 케이크는 그리 간단하게 붙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수습하려는 손길은 도리어 크림을 번지게 하며 주변을 더럽혔다.
"초콜릿케이크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요. 크림이 훨씬 어두워요."
감독관이 미간을 찌푸리며 연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이윽고 클립보드의 종이를 빠르게 넘겼는데, 아무래도 연의 인적 사항이 적힌 서류를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그의 손길은 얼마 안 가 멈추었다.
"이름이 연?"
"가명이겠죠. 케이크들이 이름으로 불리해지고 싶지 않아서 자주 쓰잖아요. 블라인드 시험이 소용없게 되었네요." 다른 감독관이 맞받아쳤다.
"유난 떨기는. 생크림이나 초콜릿처럼 유명한 케이크도 아닌가 본데. 안 팔려서 제과사가 되려는 건가?"
감독관들의 속삭임이 칼날보다도 시퍼렇게 들려왔다. 연은 귀를 떼어내고 싶단 마음이 불거졌으나, 혹여 절단한 귀의 단면에서도 크림이 흘러나와 하얀 위생복을 얼룩지게 할까 두려워 차마 시도하지 못했다.
"지원동기야 3차 면접에서 확인할 일이죠. 2차 실기를 통과할까 싶지만요. 요즘은 케이크들에게도 제과사의 기회가 열려있지만, 그건 능력과 조심성을 갖춘 소수를 위한 제도죠."
"그래요. 지금처럼 제과사의 부주의로 상처가 났다고 생각해 봐요. 크림이 반죽에 섞여들어 상품이 변질되면 큰일이죠. 케이크를 만든다는 건, 세계를 창조하는 일인데."
"케이크가 케이크를 만든다니, 이 말 자체도 얼마나 웃겨요?"
속삭임은 차츰 노골적인 조롱으로 변해갔다. 연은 눈앞이 아찔해지며 절로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각진 판 위의 나무 케이크도 검붉은 크림을 혈액처럼 뒤집어쓴 채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연은 어떻게든 작업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작품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도중 중심을 잃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와 함께 나무도 무너져내리며 원통형의 스펀지케이크로 되돌아갔다. 카스텔라가 뭉개져 바닥에 질척하게 달라붙었다. 연은 검은 크림과 먼지로 오염된 반죽을 허망하게 응시했다.
합격 여부 불합격
일주일 뒤, 연은, 그러니까 <연회장의 딸 1호>라는 이름을 가진 케이크는 제과사 기능시험 2차 실기에 불합격했다는 소식을 받게 되었다. 불합격 글자가 짙은 인터넷 창을 닫고 휴대폰을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실의에 잠긴 채 거리를 하염없이 배회했다. 걸을수록 풍경은 생소해지는데, 머릿속은 익숙하고도 케케묵은 사념만으로도 가득 차 여념이 없었다. 이제 제과사가 되기는 글렀다, 난 곧 폐기되겠지.
원래라면 옛적에 폐기되어야 마땅했으나, 취업을 목표로 하는 케이크에겐 3년의 유예기간이 주어졌다. 제과 기능시험은 1년에 한 번꼴로 치러졌고, 연은 올해로 세 번째 낙방했다. 그러니 지금 발 디딘 이 거리와 결별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터였다.
한참을 걸어 다다른 곳은 리에의 제과점이었다. 가게 진열장 너머로 <생크림 218875호>와 치즈 99835호>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양어깨에 높게 얹어진 크림이 의기양양한 자태를 자아냈다. 그 옆으로 <초콜릿 45721호>가 한 손에 'Best' 팻말을 들고 있었으며, <무지개 3027호>는 'New'라고 쓰인 머리핀을 꽂은 채였다.
모두 파티시에 리에가 만든 케이크였다. 각양각색의 아이싱으로 치장된 케이크들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그 이름마저 혀가 아릴 만큼 달콤해 보였다. 그러나 혀끝의 알알함도 잠시, 연은 불덩이를 집어삼킨 듯 위장이 뜨겁게 쓰라려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부글부글 끓는 크림을 토해내고픈 고통 속에 한참을 멈춰있다 벌컥 유리문을 열어젖히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매장은 좋게 말하자면 모던하고, 나쁘게 보자면 콘크리트 벽으로 사면이 막혀 단조로운 공간이었다. 푹신한 소파 대신 철제 의자를 놓았고, 탁자도 장식 없이 프레임에 충실했다. 샹들리에는커녕 조명조차 가느다란 줄 끝에 전구가 달랑 매달린 형태였다. 베이커리보단 폐공장을 연상케 하는 리에의 가게는 그곳에 진열된 상품들에 의해서만 생기를 얻었다. 어쩌면 시선을 끌지 않는 단순한 공간이 상품들을 돋보이게 만드는 걸까. 회색 벽과 검은 가구들은 케이크의 총천연색을 강조했다. 케이크의 창백하리만큼 옅은 분홍빛 뺨도 매장 안에서는 잘 익은 과실처럼 붉게 변모했다.
리에는 다른 제과사들과 달랐다. 제과사라면 아무리 케이크 그 자체를 주력으로 판매하더라도 으래 솜씨를 뽐내고자 하는 마음에 도취되어 이런저런 장식을 매장에 더하기 마련이었다. 케이크로 만든 풍선 또는 인형 등의 소품을 가게 입구부터 카운터까지 배치하거나, 사은품이랍시고 엉뚱하게 우윳빛 비누나 딸기맛 잉크 등을 끼워주는 식이었다. 그건 제과사 본인이 케이크로 더 많은 걸 창조해낼 수 있음을 은연중에 내보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리에의 가게에서 주인공은 오로지 케이크였다. 케이크로 모든 걸 제작할 수 있는 세상에서 그는 정직하게 케이크만을 생산해냈다. 손님들은 리에의 케이크를 경쟁 업체들의 것보다 더 맛있고 예쁘다고 평했다. 자부심조차 없이 묵묵히 계산만 하는 리에의 태도도 높은 별점의 까닭이었다. 방문자들은 제과점 주인의 무관심과 몰개성을 편히 여겼다. 리에는 스스로를 지움으로써 누구보다도 높은 판매량을 이룩했다.
연은 무채색의 인테리어를 둘러보다 주방 안쪽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리에가 오븐에서 쿠키를 꺼내는 중이었다. 그 옆으로 낯선 얼굴이 보였다. 흰 작업복을 입은 차림으로 보아 신입 제과사인 듯했다. 그런 추측을 이어가는데, 불현듯 리에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이게 누구야. 내가 만든 케이크잖아. 온다는 말도 없이 어쩐 일로 왔어?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그냥. 잠깐 들렀어요. 여긴 그대로네요. 주변은 많이 변했는데."
"좀 자주 와라. 어떻게 도통 얼굴 비추는 법이 없어. 아무리 독립했다지만 너무한 거 아니니. 그리 먼 곳에 사는 것도 아닌데. 너보다 더 멀리 사는 케이크들도 명절에는 꼬박꼬박 방문한다."
연은 그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침묵했다. 시선은 여전히 신입 제과사에게 붙박인 채였다.
"알바생 새로 뽑았어요?"
"알바는 무슨. 우리 가게 정직원이지. 작년에 제과사가 된 아이인데 참 성실해. 내 케이크들은 다 뭐 한다냐. 제과사가 되겠다며 진열장을 뛰쳐나가더니 여태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애가 없네."
연은 화제가 이번 제과 기능시험 결과로 이어질까 서둘러 말을 끊었다.
"저 신입 제과사도 케이크예요?"
리에가 아, 탄성을 내뱉더니 목소리를 조금 낮추고 속삭였다.
"고구마 7836호."
"아, 고구마. 유서 깊은 가문이네요."
"어디 가서 소문내지 마라. 요즘은 그런 경우가 잘 없다지만, 나이 든 손님 중엔 여전히 케이크인 제과사를 꺼리는 분들이 있잖냐."
연은 기가 막혀 콧방귀를 꼈다. 리에는 분명 제과 솜씨와 사업 수완을 갖춘 연륜 있는 자였으나, 그만큼 고루한 사람이었다.
"고구마 정도면 흠도 아니에요. 7000호가 넘도록 인정받은 케이크잖아요. 오히려 저 정도 되는 가문의 케이크들은 부모 친지들의 유명세와 지원으로 쉽게 팔려나가서 부러움의 대상인 걸요."
"그래? 나도 이제 감 떨어질 때 됐다. 빨리 업장을 넘기고 은퇴나 해야지. 어디 똘똘한 제과사 없나. 넌 어떻게 사냐. 시험 준비는 잘 되어가고?"
연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되뇌며 팔짱을 질렀다. 무언가 잘못한 케이크처럼 가슴이 죄어왔다.
"시험 친지 꽤 됐어요."
"벌써 그렇게 됐나. 결과는 나왔고?"
"떨어졌어요."
"또? 이번이 몇 번째냐."
"세 번째…."
리에가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호통을 쳤다.
"삼수라니. 세상에 제과 기능시험을 세 번이나 떨어지는 녀석이 있어? 나도 단번에 합격한 걸 넌 왜 못해? 집 나가겠다고 떼쓸 때 알아봤다. 매장은 손님들이 많아서 공부에 집중이 안 된다고? 시험 쳐서 취업할 생각은 약해지고 자꾸 팔려나가고 싶어진다고? 다 핑계다. 눈치 안 보고 놀고 싶은 거겠지."
연은 기도에 크림 덩어리가 들어찬 듯 목이 멨다. 몇번이고 침을 삼키고서야 겨우 웅얼거렸다.
"내가 고구마 케이크였다면 진작 합격했을 거예요."
"네가 고구마든 무지개든 그게 다 무슨 상관이냐? 실력이 중요하지."
"실력이요? 내가 걔네를 어떻게 이겨요? 집안 전체가 하나의 케이크를 제과사로 만들기 위해 돈을 쏟아붓고 온갖 인맥을 활용하는데, 난 전부 혼자 해내야 한다고요."
"그럼 재능이 없던 거지. 재능 있는 애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빛을 발하는 법인데."
리에의 빈정거림에 연은 결국 참아왔던 분통이 터졌다.
"내가 불합격한 건 당신 때문이야!"
연은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손등을 리에의 낯짝에 들이밀었다. 검은 색소가 실금처럼 남은 손이 노기로 덜덜 경련했다.
"왜 이렇게 어두운 색소로 날 만든 거냐고. 차라리 오징어먹물이면 건강에 좋다고 홍보해서 팔리기라도 할 텐데. 왜 이딴 맛대가리도 없어 보이는 식용 색소로 내 속을 채웠어?"
"그게 네 본질이다. 특별한 거지. 다른 케이크들을 봐라. 요란스러운 치장이나 하잖니. 다들 겉만 꾸밀 줄 알지 그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본인들도 잘 몰라."
연은 그 멋들어진 변명이 익숙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독립하기 직전까지 그의 창조주에게서 수차례 들어온 말이었다.
"아 제발. 그 말도 신물이 난다고요." 물론 연의 입안은 언제나 달콤했다. "그냥 실패작을 포장하려는 자기 세뇌잖아요."
연이 태어난 시기는 <무지개 케이크 1호>가 히트를 치며 신형 케이크 생산 열풍이 불어닥친 때였다. 리에와 같은 치기 어린 제과사들은 유행의 선두주자가 되리라는 욕망으로 두 눈이 번들거린 시절이기도 했다. 모두가 오븐 안처럼 뜨거운 열정 속에서 꿈에 부풀어갔다. 쏟아지는 신상품 틈에서 리에는 <연회장의 딸>이라는 이름의 새까만 케이크를 출시했다. 수많은 색 중 하필 검정인 까닭은 그저 이전까지 아무도 그런 색의 케이크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리에는 취중 진담으로 연에게 밝힌 바 있었다. 그가 입에 올리는 본질이란 그토록 가벼운 것이었다. 그러니 리에의 역작은 당연하게도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이후 그는 무난한 케이크만을 찍어내며 세상에 적응해나갔다.
"당신은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데요? 하긴, 중요치 않죠. 겉으로 보기엔 제과사니까."
"겉보기로 어떻게 내가 제과사인 걸 안다는 거냐. 너나 나나 다 똑같이 생겼구먼."
리에의 대꾸는 반쪽짜리 진실이었다. 물론 외양으로 사람과 케이크를 구별하기란 불가능했다. 표면을 칼로 갈라 그 속내를 확인해야만 비로소 실체를 알 수 있었다. 연도 누군가 칼로 잘라보지 않는 이상 그저 조금 까무잡잡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나 호명되는 순간 정체는 탄로 나기 마련이었다.
"이름이 '리에'잖아요."
한 두 글자로 된 이름은 대부분 사람의 것이었다. 반면, '생크림', '초콜릿', '고구마' 등은 케이크의 이름이었다. 최근 '무지개'와 '오징어먹물'도 신세대 케이크의 이름으로 부상했다. '장미', '라임', '딸기'와 같은 명칭은 경계가 불분명했다. 앞에 성을 붙이면 조금 독특한 여자아이 이름처럼 보였다.
연은 자신의 이름이 '장미'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사람인지, 장미꽃이 올라간 케이크인지 단번에 구분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연회장의 딸'이라는 다섯 글자는 도무지 사람의 이름처럼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연, 그 한 글자로 스스로를 지칭해보아도 본명이 까발려지면 그 즉시 모두가 그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 더군다나 연의 이름은 케이크치고도 퍽 고상한 어감이었다. 예술 작품에나 어울릴 법한 그 제목은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이름이라도 티 나지 않게 지어주지 그랬어요. 개명 신청은 제과사의 자격을 획득했을 때나 가능하단 걸 알잖아요."
"이젠 이름을 가지고 불평을 하는구나. 세상에 너 같은 케이크는 처음 본다. 이름이 어떻든, 사람이 아니라 케이크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이번에 들어온 신입도 케이크인데 제과사잖니. 뭐, 걔는 집안의 도움을 받았다고? 나도 도와주는 이 없이 제과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런데 넌 매사 불평만 하면서 인생을 망치고 있구나."
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숨결이 설탕으로 만든 실타래처럼 막막하게 늘어졌다.
"이름이 중요치 않다고요? 저 고구마 케이크는 아직 개명을 안 했어요?"
"곧 하겠지. 제과사가 된 케이크들은 다 하니까."
"왜 개명을 할까요?" 연의 눈에서 검은 크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래요, 이렇게 언쟁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어차피 난 조만간 폐기처분 될 텐데. 이젠 끝이라고요."
연은 턱 끝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검은 크림이 소맷단에 흥건히 묻어났다. 아마 얼굴도 덕지덕지 크림이 묻어 마치 검게 타버린 케이크처럼 보일 터였다. 그 초라한 행색을 상상하자 또다시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폐기처분이라니!" 리에는 연의 몰골을 보고 가여운 마음이라도 들었는지, 혹은 특수 케이크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던 젊은 날에 대한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건지 마치 자기가 폐기라도 되는 양 기겁했다. "꼭 제과사의 길만 있는 건 아니지. 폐기 일자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아직 통지서가 날아오지 않았다면 몇 주간의 여유가 있어. 케이크답게 팔려 가는 미래도 있지. 내 가게 판매대에 널 올려주마. 3년 전보다 가게 규모도 커졌으니 팔릴 수 있을 거다."
연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쓰레기장으로 추락하는 최악의 결말은 피해야 했다. 제과사가 되겠다는 헛된 꿈을 접을 때가 되었다.
*
연은 진열장 구석에 자리 잡았다. 졸업한 학생이 몇 년 만에 모교로 돌아와 책걸상에 앉아본 듯, 어색한 기분이 들어 요리조리 자세를 바꿔가며 한참 부산을 떨어댔다. 다른 케이크들이 그를 호기심과 경계심 어린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 시선을 뒤늦게 의식한 연은 큼큼, 멋쩍은 헛기침을 내뱉고 유리창 너머를 응시했다. 환한 거리가 시야에 들어찼다.
길 건너편은 각종 수공예 상점들이 들어선 풍경이었다. 신발부터 모자까지 한 블록에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가게마다 취급하는 물품이 달랐다. 그 앞을 지나던 한 행인이 발을 삐끗하며 멈춰 섰다. 구두 굽이 부러져 달랑거리는 상태였다. 그는 절뚝이며 근처의 신발 전문 매장으로 들어갔다. 행인이 사라진 도보에는 묽은 자국이 남았는데, 그건 신발 굽에서 밀려 나온 커스터드 크림의 흔적이었다.
한낮의 햇볕이 쇼윈도를 달궜다. 유리장 안에 냉방장치가 있었으나, 여름의 불볕더위는 찬바람을 통과하고도 사그라지지 않고 케이크들의 피부 위로 쏟아졌다. 케이크들이 녹아내린 유지를 조심스레 닦아내고 그 위로 여분의 크림을 꼼꼼하게 덧발랐다. 생크림
단편소설 당선작 / 전혜린 (하에서 계속)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