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석의 발견과 되새김] 유월의 꽃들에 대한 단상들

  •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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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6-24  |  발행일 2025-06-24 제22면
이하석 시인

이하석 시인

#장미


어제(23일) 한국작가회의가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전쟁 규탄 기자회견'을 했는데, 구호 가운데 하나가 '포탄 대신 꽃을!'이었다. 장미의 계절에 새삼 꽃에 대해 생각한다. 더불어 "꽃잎마다/ 심연에 도착했던 부분이 있다네/ 꽃잎마다/ 지상으로 심연을 이끌고 온 색깔이 있다네"(송재학 '꽃잎마다 너라는 잔상')라는 시가 읽힌다. 시인이 말하는 '심연'은 어떤 세계일까?


내게 심연은 페허다. 한국전쟁 후 도시로 이사 온 나는 전후의 폐허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가지고 놀던 완구들도 총알 껍데기와 시레이션 박스 등 전쟁이 쓰다 버린 물건들이었다. 빈 포탄을 매달아 종을 치던 학교도 있었다. 그래서 유월이면 전후의 폐허 위로 솟구치던 꽃들이 먼저 떠오른다. 장미의 힘이 컸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피난민 주거 지역을 오갈 때 그 을씨년스러운 풍경 속에도 장미를 심은 화분들이 놓여 꽃들이 강렬하게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래, 내게 장미는 우리 삶의 부서지고 망가진 심연에서 솟아오른 듯한 비장함으로 떠오른다.


장미를 폐허와 연상시키는 시가 파울 첼란에게도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네 우리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으리니, 활짝 피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의,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로"


루마니아 태생 유대인으로 독일 말로 시를 쓴 첼란은 전후 독일 문학을 혁신시킨 시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마니아가 나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자 첼란은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부모는 살해되었다. 1970년 5월 1일 프랑스 파리의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도 인상적이다. 시집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는 그러한 정서를 반영한다. '땅에서 넘어진 자가 그 땅을 짚고 일어나듯(보조 지눌)' 말로 생긴 상처를 바로 그 말로 승화시키는 게 시다. 첼란은 '아무도 아닌 자'가 된 사람들을 아무도 아니었다는 바로 그 이유를 들어 찬미함으로써 그가 겪은 역사의 비극성을 선명하게 부각한다.


#수국


물의 꽃. 갈증을 견디지 못하는 꽃.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수국을 닮은 여인이 등장한다. 인실이. 일제 강점 속에서 일본인과 관계하여 아이를 가짐으로써 죄책감에 시달리는 여인. 이를 연민으로 바라보는 찬하가 생각하는 꽃이 수국이었다. "그것은 찬하 가슴 밑바닥에서 우러나는 연민 때문이었다. 찬하는 지금 자기 집 뜰에 한창인 수국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축축한 음지에서 흐드러지게 핀 수국, 병자 방에는 꽂지 않는다는 그 수국이 녹색으로 변했을 때, 찬하는 히비야 공원에서 녹색의 여인으로 착각한 인실의 모습을 연상했던 것이다."


수국은 신비한 꽃이다. 토양의 산도에 따라 꽃 빛깔이 달라진다. 수국은 자신이 뿌리내린 토양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감응하는 셈이다. 그래서 "수국은 실존의 꽃이다. 고정된 자아를 꿈꾸지 않으며 살아가는 조건 속에서 매 순간 스스로 경신한다. 조건을 감각화하여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물들인다."(박 스테파노 '수국 아래서, 조르바는 춤춘다')라는 말이 나오나보다.


수국은 꽃 색의 고상함, 특히 푸른빛의 신비함으로 여름 여행객들을 은근하게 유혹한다. 이에 부응하듯, 각지에서 다양한 품종의 수국이 어우러진 이색 정원이 조성되고 있다.


경기도 가평의 '아침고요수목원'은 물론, 거제 '바람의 언덕'도 수국의 명소다.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의 '카페 마노르블랑'은 100종 이상의 수국이 꽃길을 이뤄 방문객을 맞이한다. 같은 안덕면 병악로에 위치한 '카멜리아힐'은 제주 한라산 자생 수국부터 개량된 품종까지 폭넓은 수국 컬렉션을 자랑한다. 이밖에 김해 대동면 수안 마을의 수국정원축제, 강진 보은산 V랜드공원 수국길 축제를 비롯하여, 광주의 하담 숲, 거창의 거창사건추모공원의 수국도 볼만하다.


장마철이다. 물의 꽃인 산수국이 유난히 생기를 발하는 시기다. 잦은 비로 토양이 변하면 꽃 색깔도 바뀌는 걸 살피는 묘미도 있다. 푸른 하늘빛이 어느 순간 슬그머니 노을빛으로 바뀌는 것이라니. 한편 일반 수국에 비해 꽃이 작으면서도 정갈한 한국 토종 수국의 매력에도 은근히 빠지는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큰금계국


온통 노란 꽃들. 큰금계국의 확산이 한반도를 덮고 있다. 최근 포항이 이 꽃들로 인해 우려감이 높아가고 있다는 신문 기사를 읽는다. 아파트 단지는 물론, 도로와 인도, 건널목과 외곽지의 구릉들이 온통 노랗단다.


큰금계국은 5월~8월 사이 꽃 피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북아메리카가 원산지다. 1950년대 관상용으로 도입된 후 '노란 코스모스'란 애칭과 함께 도시 경관 조성에 널리 활용됐다. 그때 생긴 이름이 '면서기꽃'이다. 지자체마다 도로변을 이 꽃으로 덮기 시작하면서 생긴 이름이다. 포항시가 지난 2023년 관광객 유치와 도시 경관 개선을 목적으로 포항 운하 인근 1만5000㎡ 산책로에 큰금계국을 심은 것도 그런 뜻이었을 터였다. 그게 크게 번져 올해는 도시 곳곳을 뒤덮을 만큼 개채수가 폭증했다.


새삼 생태계 교란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번식력이 뛰어나고 재래 식물의 생육을 크게 방해한다는 소리가 커진다. 국립생태원은 큰금계국을 '생태계위해성 2등급' 외래생물로 분류하고 있다. "뛰어난 번식력으로 다른 식물의 생육을 방해할 우려가 있어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 큰금계국은 이미 중국과 일본에서 생태계 교란 식물로 인식되어 오래전부터 범국가적 퇴치 대상으로 뽑혀져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생태계교란종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뒤늦었지만, 이를 막을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온다. 우리 국토에는 지금 개망초와 기생초, 수레국화, 바늘꽃 등 외래 식물들의 꽃들이 번성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특히 금계국의 확산은 외국에서 생태계 교란 식물로 지정되지 않은 다른 기타 외래종보다 그 위험성이 훨씬 높은 식물이다. 생물의 다양성 보호와 국토의 정체성 관리라는 민족적 차원의 섬세한 식생 연구가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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