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추 거문고 이야기] <37>기생과 거문고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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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7-18 06:00  |  발행일 2025-07-17

조선의 대표적 풍속화가 신윤복의 그림 중 '거문고 줄 고르는 여인' 작품이 있다. 한 여인이 오른손으로 거문고 뒷면의 돌괘를 돌려가며 거문고 줄의 강도를 조절하고 있다. 다른 한 손은 거문고 줄을 튕겨보면 소리를 점검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긴 담뱃대를 입에 문 한 여인은 이를 지켜보고 있다. 어린 시녀는 줄을 잡고 줄 고르는 것으로 돕고 있는 모양새다.


이 여인들은 머리 모습이나 복장으로 보아 기생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방의 기생들이 거문고 연습에 앞서 거문고 줄을 고르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니 기방의 일상 중 한 장면을 포착한 것이고, 이 그림은 기생에게 거문고는 필수 악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거문고는 선비들의 반려 악기로 사랑받았던 현악기다. 이런 거문고를 선비를 상대하는 기생들도 잘 다루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대표적 기생인 황진이와 이매창 등 명기들도 모두 거문고의 대가들이었다.


신윤복 그림 '기방무사(妓房無事)'. 안쪽 방의 책상 곁에 거문고의 꼬리에 해당하는 봉미(鳳尾) 쪽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 그림 '기방무사(妓房無事)'. 안쪽 방의 책상 곁에 거문고의 꼬리에 해당하는 봉미(鳳尾) 쪽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기생의 필수악기 거문고


기생은 신분상으로는 천민에 속했으나 지배 계층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기예를 익힌 종합 예술인이었다. 거문고를 비롯해 가야금, 장구, 아쟁, 해금 등 악기는 물론이고, 가곡을 비롯한 성악, 춤, 서화 등을 익힌 만능 예술인이었다.


신윤복의 풍속화 중에 '기방무사(妓房無事)'라는 그림이 있다. '기생방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라는 역설적인 제목의 이 작품에서도 거문고가 기생의 필수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안쪽 방의 책상 곁에 거문고의 꼬리 부분이 그려져 있다. 지배계층이 원하는 예술을 선사해야 했던 기생들이 선비들이 애호하는 악기였던 거문고를 다루고 가까이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밀직부사를 지낸, 지조 있고 청렴한 관리로 칭송받은 석재(石齋) 박효수(?~1337)가 남긴 시 중 '달밤에 늙은 기생의 거문고 소리를 듣다(月夜聞老妓彈琴)'가 있다. '칠보단장 방에서 춤추며 노래할 적에/ 황량한 변방에서 늙을 줄 어이 알았으리/ 돈은 여유가 없어 장문부(중국 사마상여의 글)는 사지 못하고/ 꿈에 비단에 시를 수놓아 헛되이 전하네/ 눈물은 얼마나 오나라 비단 소매를 적셨나/ 훈향이 월나라 비단 치마에 젖어 있구나/ 달빛 창가에 들리는 쓸쓸한 거문고 소리/ 평생 알아주는 이 없어 한탄하는 듯하구나'.


◆90년 전 잡지에 실린 기생 관련 글


1935년 10월1일 자 '삼천리'라는 잡지에 실린 윤백남(尹白南)의 글 '예술상(藝術上)으로 본 옛 기생妓生·지금 기생妓生'의 내용 일부다. 기생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기생에게 거문고는 어떤 악기였는지 엿볼 수 있다.


'기생이라 하면 우리는 흔히 노류장화(路柳墻花)를 연상하게 된다. 웃음을 팔고 술 부어 주며, 춤을 추며 노래만 부르는 직업여자로서는 매우 아름답지 못한 종류의 인간으로 안다.


그러나 몇 백 년 전부터 조선 말기까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기생들에게서 간혹 진실한 맛을 엿볼 수 있었으며, 고상하고 깨끗한 맛을 찾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의 가슴속에는 깊이 절조(節操)가 숨어있고, 양심이 또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리와 순정이 넘쳐흐르는 옛이야기를 우리는 자주 듣게 된다.


~ 이렇게 오랜 옛적부터 있어 내려온 기생이란 그러면 어떠한 종류의 여자들이었던가. 요사이 우리들은 흔히 기생하면 으레 구락부나 오락장에서 불러다가 술 부어주며 노래 부르며 춤추며 별별 추한 짓을 다하면서 뭇 사나이들에게 웃음과 고기 덩이를 파는 종류의 인간인 줄로 연상된다.


그러나 몇 백 년 전은 그만두고라도 몇 십 년 전만 하여도 기생이라고 하면, 오늘날 같은 그러한 종류의 기생이 아니었다. 그들은 반드시 시 한 줄은 지을 줄 알아야 하고, 율(律) 한 수(首)는 읊을 줄을 알아야 한다. 가사는 으레 불러야 하였고, 거문고나 바둑쯤은 반드시 알아야 하였다.


그들은 위로 고관대작으로부터 아래로는 낭인(浪人)과 천한 계급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한결같이 대하여 왔다. 그들은 고관대작들을 상대하여 놀만한 기품과 상식을 닦기에 힘쓸 뿐이고, 돈이나 물질에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고, 다만 고상하고 순결한 기품을 기르기에만 힘써 왔다.


그들은 반드시 '서방'을 가지고 있다. 만약 돈을 번다하더라도 그 돈은 자기의 서방 소유물이 될 뿐이지 자기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의 기생들처럼 다만 물질이나 돈에만 얽매여서, 어떻게 하면 그 돈 많은 사나이에게 잘 보여서 돈을 많이 벌어볼까 하는 그런 심사(心思)는 터럭 끝만도 안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옛 기생의 생활이란 참으로 깨끗하고 고귀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오늘날의 기생들이란 너무도 기생도(妓生道)에 어그러진 아름답지 못한 길을 걷고 있는 것 같다.


옛적에는 지금과 같이 구락부나 기생권번(妓生券番) 같은 데가 있는 것이 아니고, 기생방이라고 하는 일종의 사교장이 있었을 뿐이다. 이 기생방에는 고관대작이나 어떠한 천한 사람이든,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었다. 실로 그 곳에는 절대적으로 평등이었다. 오늘날처럼 부귀빈천을 저울질하며 대하는 법은 전혀 없었다. 실로 그곳은 오늘날의 데모크라시, 그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기생방이 무질서하거나 난잡하지는 않았다. 그곳에서는 소위 '신사도'의 불문율이 꽉 서 있었다.


기생방에 들어오면 10명이고 20명이고 한데 모여서 똑같이 놀지, 어느 개인이 독점하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못한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기생방에 다니는 여러 사람들끼리 다 같이 제제하게 되는 것이며, 또는 기생의 손님에 대한 접대가 아름답지 못할 때에는 기생방에 다니는 여러 사람들이 그 기생의 서방을 기생에게서 떨어지게 할 수 있으니, 만약 그리된다면 그 기생서방은 여러 손님들을 찾아다니며 자기의 잘못을 사과한 후에 손님들이 다시금 허락하여야 비로소 그 기생의 서방이 되는 풍속이 있었다. 이만치 옛 기생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기생도'가 있었다.


그러면 기생들과의 오직 하나의 사교장인 기생방에서는 기생들과 어떻게 놀았던고 하면, 오늘날과 달라서 그곳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고, 춤도 추지는 않았다. 여러 손님이 쭉 모인 가운데서 율이나 시를 짓고, 가사나 한 곡조 부르든지, 거문고를 타지 않으면 바둑이나 두며 그날그날의 청유(淸遊)를 일삼는 것이 그들의 업이었다.


옛 기생이라고 하면 거문고는 거문고의 선생에게서, 글은 글 선비에게서, 서화(書畵)는 글 잘 쓰고 묵화 잘 치는 선생에게서 몇 해를 고심하여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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