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풍요로운 문화도시 산소카페 청송] 7. 청송 추현 상두소리

  • 박관영·김광재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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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8-05 20:20  |  수정 2025-08-07 10:06  |  발행일 2025-08-07
때론 눈물바다, 때론 웃음바다…죽음 어루만지는 상여의 위로
청송 추현상두소리보존회 회원들이 공연 을 하고 있다. 전통장례에서 선소리꾼과 상여를 메고 가는 상두꾼들이 매기고 받는 형식으로 부르는 노래를 상두소리, 상여소리라고 한다.  <청송군청 제공>

청송 추현상두소리보존회 회원들이 공연 을 하고 있다. 전통장례에서 선소리꾼과 상여를 메고 가는 상두꾼들이 매기고 받는 형식으로 부르는 노래를 상두소리, 상여소리라고 한다. <청송군청 제공>

청송 추현상두소리 시연 행사에서 선소리꾼이 선창을 하고 있다. <청송군청 제공>

청송 추현상두소리 시연 행사에서 선소리꾼이 선창을 하고 있다. <청송군청 제공>

선소리꾼과 상두꾼 주고받는 노래

1997년 경북도 무형유산으로 지정

故신상경 예능보유자 47세에 첫소리

신영국 전승교육사 아버지 뒤이어

고갯마루 넘던 전통장례문화 퇴색

전수관 대신 전시관 형태 운영 계획

녹음·사진자료로 잊힌 소리 살릴 것

청송군 진보면에서 안동시 임동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가랫재다. 국도34호선이 지나가는 고개로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넘어 다녔다. 조선시대에는 가랫재 아래에 추현원이 있었다. 원(院)은 관원들을 위해 나라에서 운영하는 숙식 시설인데, 진보면 추현리의 자연마을 '원마'가 원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지난해 10월에는 가랫재터널이 개통됐다.


예로부터 글을 사랑한 선비는 가까운 이가 세상을 떠나면 글을 지어 망자를 기렸는데 이를 '만시(挽詩)' 또는 '만사(挽詞)'라 했다. 만시의 만(挽)은 '상여를 끈다'는 뜻이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청송 진보면 추현리 상두소리 재현 행사. <문화재청 제공>

예로부터 글을 사랑한 선비는 가까운 이가 세상을 떠나면 글을 지어 망자를 기렸는데 이를 '만시(挽詩)' 또는 '만사(挽詞)'라 했다. 만시의 만(挽)은 '상여를 끈다'는 뜻이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청송 진보면 추현리 상두소리 재현 행사. <문화재청 제공>

가랫재라는 이름은 가래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로는 가래나무 추(楸), 고개 현(峴) 자를 써서 추현이라 했다. 평산 신씨 집성촌인 진보면 추현리는 가랫두들, 원마, 상고산, 하고산 등의 자연마을이 있는데, 하고산 마을에는 경북도 무형유산 청송추현상두소리 전수관이 있다.


전통장례에서 선소리꾼과 상여를 메고 가는 상두꾼들이 매기고 받는 형식으로 부르는 노래를 상두소리, 상여소리라고 한다. 청송추현상두소리는 선소리꾼 고(故) 신상경(1926~2004)을 예능보유자로 해 1997년 경북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지금은 신상경 보유자의 아들인 신영국(61) 전승교육사가 선소리꾼으로 소리의 맥을 잇고 있다.


청송 추현상두소리 신영국 전승교육사. 부친인 고(故) 신상경 예능보유자를 따라 선소리꾼의 맥을 잇고 있다. 신씨는 추현상두소리보존회 회장으로 보존과 전승을 위해 힘쓰고 있다.

청송 추현상두소리 신영국 전승교육사. 부친인 고(故) 신상경 예능보유자를 따라 선소리꾼의 맥을 잇고 있다. 신씨는 추현상두소리보존회 회장으로 보존과 전승을 위해 힘쓰고 있다.

청송 추현상두소리 신영국 전승교육사. 부친인 고(故) 신상경 예능보유자를 따라 선소리꾼의 맥을 잇고 있다. 신씨는 추현상두소리보존회 회장으로 보존과 전승을 위해 힘쓰고 있다.

청송 추현상두소리 신영국 전승교육사. 부친인 고(故) 신상경 예능보유자를 따라 선소리꾼의 맥을 잇고 있다. 신씨는 추현상두소리보존회 회장으로 보존과 전승을 위해 힘쓰고 있다.

보유자였던 신상경 선소리꾼은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예천군 상리면에서 성장했으며 7세에 부친을 따라 만주로 갔다. 1946년 귀국해 청송 진보, 원주, 예천, 상주, 장성 등지를 전전하다 부친의 고향인 진보로 돌아와 정착했다. 소리꾼의 자질을 타고난 그는 예천 용문면 금당실에서 들은 상두소리에 빠져들었다. 예천, 상주에서 10여년 거주하면서 각 마을의 상두소리를 듣고 배웠다. 청송 진보로 돌아와서도 한양오백년가, 해방가, 옥설가, 회심곡, 백발가 등을 스스로 배워 익히며 자신의 노래로 만들었다.


갈고닦은 상두소리를 처음으로 세상에 펼쳐 보인 것은 그의 나이 47세 가래두들 마을의 장례에서였다. 선소리꾼으로 나서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던 문중 어른들로부터 야단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그의 초성과 사설은 때로는 눈물바다를, 때로는 웃음바다를 만들어내며 이승에 남은 사람들의 응어리를 풀어줬다. 인근 지역의 장례에 계속 초빙되면서 선소리꾼으로 명성이 높아졌고, 청송추현상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추현상두소리는 대돋움소리, 상엿소리, 덜구소리 등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돼있다. 대돋움소리는 출상 전날 선소리꾼과 상두꾼들이 연습 삼아 빈상여로 호흡을 맞춰보는 소리이면서, 망자와 마지막 밤을 보내는 유족들을 위로하고 이별을 준비시키는 소리이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채록된 신상경 선소리꾼의 대돋움소리 사설은 이렇다.


"에이이 간다 간다 나는 간데이/ 부데 부데 잘 있거래이/ 에이여/ 북망산이 멀다드니 대문 밖이 하적일데/ 에이여 이후후후/ 아이고 아이고 우이 갈꼬/ 에이여……"


내일 날이 밝으면 집을 떠나 산으로 가야하는 망자가 산 사람들에게 이제 나는 떠나니 부디 잘 지내라고 인사를 한다.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 있다는 말로 삶의 덧없음을 한탄하고, 이승을 떠나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대문 밖이 하적일데'라는 말은 대문 밖이 바로 하직하는 장소, 즉 저승이라는 말이다.


망자를 태운 상여가 장지로 갈 때 부르는 상엿소리는 "북망산이 멀다드니 너화넘차 너허호/ 너호 너호 너화넘차 너허호/ 대문 밖이 하적일데 너화넘차 너허호/ 너호 너호 너화넘차 너허호/ 심심산곡 험한 길에 너화넘차 너허호/ 너호 너호 너화넘차 너허호……"로 채록돼 있다.


받는 소리가 '너화넘차'인 상엿소리는 우리나라에 넓게 펴져있으며, '넘차소리'라고도 한다. '넘차'에는 넘는다는 의미가 담겨있어 산이 많은 지역의 정서가 녹아있다.


너화넘차류에 맞춰 가던 상여가 가파른 곳을 오를 때는 상엿소리 후렴이 '어허시야'로 변하면서 상두꾼들의 보폭과 속도를 조절한다. "어허시야/ 어허시야/ 우리 아들 어데 갔노야/ 어허시야/ 어허시야/ 만학창봉 높은 곳에/ 어허시야/ 어허시야/ 아이고 답답 내 못갈따……"


장지에 도착한 후 봉분을 다질 때는 덜구소리를 한다. "어허 덜구여/ 어허 덜구여/ 덜구꾼은 여덟인데/ 어허 덜구여/ 나까진 아홉이라/ 어허 덜구여/덜구꾼요 들어보소/ 어허 덜구여/ 먼 데 사람 듣기 좋게/ 어허 덜구여/ 저테 사람 보기 좋게/ 어허 덜구여/ 등 맞추고 배 맞추코/ 어허 덜구여/ 가닥나기 하지 말고/ 어허 덜구여……"


덜구소리를 하면서 유족, 친지들을 차례로 불러 망자와 개별적으로 불러서 작별을 고하게 하고 저승길 여비를 보태도록 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신상경 보유자는 장례를 맡게 되면 망자와 유족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그를 바탕으로 즉흥적인 사설을 창작하는 데에 능했다. 선소리꾼의 이런 능력은 유족들이 가족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좋은 영향을 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흘렀지만, 신영국 전승교육사는 어르신들이나 친구들로부터 "자네 어른이 하시던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다고 한다.


청송추현상두소리가 경북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뒤 신상경 보유자는 보존과 전승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평산 신씨 문중 소유의 땅 일부를 전수관 부지로 내놓아, 청송추현상두소리 전수관이 세워질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전수관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상여는 뼈대만 서 있는 전수관 앞을 지나갔다. 당시 전승교육사(전수교육조교)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상주로, 한 사람은 선소리꾼으로 스승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다. 신영국 전승교육사는 추현상두소리보존회 회장으로 보존과 전승을 위해 힘쓰고 있고, 안찬경 전승교육사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청송 추현상두소리전수관. 청송추현상두소리가 경북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뒤 신상경 보유자는 보존과 전승을 위해 평산 신씨 문중 소유의 땅 일부를 전수관 부지로 내놓았다.

청송 추현상두소리전수관. 청송추현상두소리가 경북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뒤 신상경 보유자는 보존과 전승을 위해 평산 신씨 문중 소유의 땅 일부를 전수관 부지로 내놓았다.

앞으로 실제 장례에서 추현상두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을 것 같다. 인구와 가치관의 변화, 묘지 부족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매장 중심의 전통적 장례문화는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2000년 33.7%였던 화장률이 올해에는 94%가 됐으며, 유골을 자연에 뿌리는 산골, 수목장 등 다양한 형태의 장례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무형유산 중에서도 논매기 소리 같은 노동요와 상두소리 같은 의식요는 경연대회, 발표회, 체험행사 등을 통해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멸종위기동물을 박제로 보존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는데,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다.


추현상두소리는 예전에 청송문화제나 진보민속경연대회에서 선보인 적은 있으나 지금은 상여도 없고 상두꾼을 모으기도 어려워 시연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신영국 전승교육사는 "방송사, 대학교 등 여러 곳에서 연락이 오는데 특별히 보여 줄 것도 없고 해서 전수관을 전시관 형태로 바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또 축제나 문화제에 부스를 운영해 사진자료와 녹음자료 등을 통해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추현상두소리를 알리는 일에도 힘쓸 생각이라고 한다.


청송 추현상두소리전수관 내부 전경. 보존회는 앞으로 회관 건물을 전시관 형태로 바꿔 운영하는 한편 축제나 문화제에 부스를 운영해 사진자료와 녹음자료 등을 통해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추현상두소리를 알리는 일에 힘쓸 계획이다.

청송 추현상두소리전수관 내부 전경. 보존회는 앞으로 회관 건물을 전시관 형태로 바꿔 운영하는 한편 축제나 문화제에 부스를 운영해 사진자료와 녹음자료 등을 통해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추현상두소리를 알리는 일에 힘쓸 계획이다.

청송추현상두소리 전수관을 나와 가랫재터널을 지나면서, 문득 이 터널 위 고갯마루는 이제 인적이 드문 곳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걷거나 말을 타거나 차를 운전해서 넘었던 고갯길은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힐 운명을 맞았다. 하지만 예전에 가랫재를 넘나들었던 사람들 중에는 터널을 지나면서 예전 고갯마루의 풍경과 그와 연결된 기억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글=김광재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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