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산 신천동의 메노나이트 실업학교 전경. 1964년 촬영된 사진을 복원해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흰색 지붕과 바로 뒤 초록색 지붕의 건물은 각각 교실과 교무실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메노나이트 아카이브 제공>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 봉사자들
경산에 직업중고교 세워 구제사역
실용기술·재봉 가르쳐 살 길 열어줘
선교사 활동 학교 넘어 마을로 퍼져
공동체와 신뢰, 실천의 삶 밑거름 돼
지난해 설립 경산문화관광재단도
메노나이트 실천정신 이어받아서
문화유산·공동체 자산 발굴 힘써
'지속 가능한 문화도시' 성장 기대
1950년 6월25일. 한반도에 전쟁이 몰아쳤다. 사람들은 가족을 잃고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남쪽으로 몰려들었다. 경북 경산에도 피란민이 끝없이 이어졌다. 흙과 먼지가 휘날리는 경산 신천동에는 천막과 판잣집이 빼곡했다. 아이들은 거리를 떠돌았고, 미망인들은 생계를 잃은 채 막막한 나날을 보냈다. 굶주림과 불안이 얽히며 절망으로 가득한 날들이었다.

메노나이트 직업학교의 1955년 모습. 경북대학교 농과대학 경산실습장이었던 곳을 메노나이트 중앙재단 한국지부가 부지를 매입·임대해 학교를 세웠다. <메노나이트 아카이브 제공>
◆고아와 미망인을 일으켜 세운 푸른 눈의 사람
그 짙고 깊은 절망의 한가운데, 푸른 눈의 이방인들이 나타났다. 군복이 아닌 소박한 옷차림, 총이 아닌 재봉틀과 연장, 약품과 식량을 들고.
그들은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MCC)의 봉사자들이었다. 메노나이트는 기독교 재세례파(再洗禮派) 중 하나로 평화, 세계구호와 구제, 양심의 자유 등을 핵심 정신으로 삼았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돌보고자 했던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는 17만명의 피난민을 구제하기 위해 한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했다. MCC는 물자구제사업, 직업학교, 가족 지원 프로그램, 전쟁미망인 자활훈련 등 구제 사역 계획을 세워 전쟁미망인과 고아를 교육하고 원조했다.
그들은 유창한 연설도, 강압적인 설득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아픈 아이의 이마를 짚고 찢어진 옷을 꿰맸으며 허기진 이웃에게 밥을 지어 내밀었다.
사람들은 처음엔 경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들이 '말보다 행동이 빠른 사람들'임을 알게 됐다. 푸른 눈의 사람들, 그들이 준 것 중 가장 큰 것은 재봉틀과 연장, 약품과 식량이 아니라 신뢰와 사랑이었다.

메노나이트 봉사자들은 1953년 전쟁고아들을 위해 경산 신천동에 메노나이트 직업학교를 세웠다. 이 시기에는 학력인가를 받기 전이라 학력인정을 위해서는 검정고시를 봐야 했다. 사진은 메노나이트 직업학교 입구 간판. <메노나이트 아카이브 제공>
경산 신천동에 본격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53년 메노나이트직업중고등학교(MVS)가 세워지면서였다.
학교 이름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서 펼쳐진 교육은 혁신적이었다. 목공·철공·인쇄·농업과 같은 실용기술은 물론, 함께 살아가는 태도와 평화를 지키는 방법까지 가르쳤다. 전쟁고아였던 학생들에겐 몸과 마음의 위로였으며, 함께 사는 학생들을 챙기고 돌보는 성장의 계기였다. 여성과 미망인들은 처음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바느질과 재봉을 배우며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 앞에 앉았다.

경산 메노나이트 직업학교 교무실 건물. 지금까지 남아있는 주요 건물 중 하나다. 경산문화관광재단은 교무실을 비롯해 이곳 부지를 기억의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졸업생들은 경산으로, 대구로, 서울로, 해외로 각자의 길을 찾아 흩어졌다. 그리고 재봉사, 교사, 농촌 지도자, 사회 지도자로 각계각층에 자리잡았다. 어떤 이들은 대학에 진학해 학자로 활동을 이어갔다.
선교사들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 신학대 총장을 맡은 졸업생도 있다. 영어를 배워 바다를 건너 일자리를 찾기도 했다. 성실하게 가정을 꾸리며 지역에 남은 이도 있다. 졸업생들 모두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사회에 기여하며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1962년 메노나이트 실업고등학교 제4회 졸업식 기념사진. 메노나이트 직업학교 졸업생들은 대구와 경산, 수도권과 해외로 나가 건실한 사회인이 됐다. <메노나이트 아카이브 제공>
한 졸업생은 "메노나이트 교회를 소개하거나 선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선교사와 교사는 말보다 행동으로, 가르치는 마음으로 봉사하며 살았다. 학생들은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이들의 태도를 그대로 익혔다.
때론 엄격하고 힘들었다. 예외 없이 매일 2시간씩 일해야 했다. 청소와 같은 가사노동을 하고 농장일을 하거나 재봉틀을 돌렸다. 고교 3학년이 되면 대입 준비와 노동을 병행해야 했다. 그러나 오히려 학습과 노동의 병행 덕에 균형을 추구하는 방식을 몸으로 배웠다. 자립감과 책임감을 키우는, 실천의 삶이 되는 밑거름이었다. 학생들에게 학교는 직업공부를 하는 곳이면서 삶을 배우는 곳이었다.

메노나이트 직업학교는 고아뿐 아니라 전쟁으로 가족과 남편을 잃은 미망인들도 보살폈다. 미망인들은 재봉틀 기술을 배우며 생계를 꾸려나갈 기회를 얻었다. <메노나이트 아카이브 제공>
◆직업학교 넘어선 생활공동체
메노나이트의 활동은 학교를 넘어 경산의 여러 마을로 퍼졌다. 학교 주변에는 공동 텃밭이 조성돼 감자가 심어졌고, 퇴비 농법과 회전 작물 재배 같은 새로운 방식이 시도됐다. 미국에서 들여온 홀스타인 젖소는 경산 장터에서 큰 구경거리였는데, 곧 지역 농가에 도입돼 낙농업의 기반을 넓혔다. 4-H 클럽과 농민회, 부녀회가 조직돼 위생·영양, 농업 기술이 전파됐고 마을회관과 공중목욕탕이 세워져 주민들의 생활 수준은 한 단계 높아졌다. 이 작은 혁신들은 훗날 새마을운동으로 이어지는 기술적·사회적 토대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홀스타인 젖소 송아지를 돌보는 메노나이트 직업학교 농업반 학생들. 당시 홀스타인 젖소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품종으로, 경산지역에서 신기한 볼거리가 되기도 했다. <메노나이트 아카이브 제공>
재난이 닥쳤을 때도 메노나이트는 빠르게 움직였다. 1959년 태풍 사라로 금호강과 형산강이 범람했을 때, 그들은 옥수수가루와 구호품을 나눠주고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1961년 대구 서문시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을 때에도 피해 가정에 침구와 생활 물자를 전했다. 이런 활동은 단순히 구호 차원을 넘어 지역 사회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는 일이었다.
메노나이트는 선교를 위해 교회를 짓지 않았다. 종교적 공간을 세우는 대신 삶 속에서 실천으로 신념을 보여주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성경을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삶은 누가 봐도 목회자 같았다"는 회상이 전해진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종교의 언어보다 공동체와 신뢰, 평화를 지켜내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경산 메노나이트 주요건물 중 하나인 예배당의 동쪽 벽면. 1960년에 완공됐으며, 주로 졸업사진은 예배당 정면에서 촬영됐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기억의 틀을 만드는 작업
1971년, 20년의 활동을 마치고 메노나이트가 조용히 떠났다. 그들이 떠난 그곳에는 건물, 물건, 그리고 봉사라는 유산이 남았다. 이후 긴 세월 동안 이들의 존재는 잊혔지만, 그들이 남긴 삶의 방식과 정신은 마을과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스며 있었다. 2025년, 경산은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며 이 기억을 다시 꺼내 들고 있다.
메노나이트직업학교가 있던 경산 신천동을 기억의 공간, 메모리얼파크로 조성하자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낡은 교실을 복원해 학생들의 생활 공간을 체험할 수 있는 전시관으로 만드는 등 공동체의 의미를 느끼게 하자는 구상이다. 단순한 역사 복원이 아니라, 오늘의 교육이 놓치고 있는 가치를 되새기려는 시도다. 경쟁과 성과 중심으로 달려가는 현재의 사회에 공존과 신뢰, 평화와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묻는 일이기도 하다.
◆수요와 체험 중심의 새 문화도시
메노나이트직업학교에 담긴 생활개선과 실천정신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은 '경산문화관광재단'의 설립 목적에도 닿아있다. 2024년 경산시가 설립한 경산문화관광재단은 지역의 문화유산과 공동체적 자산을 발굴하고, 이를 현대적으로 되살리고 있다. 공연장 운영, 문화예술 지원, 지역 축제 기획 등을 통해 시민과 도시의 삶을 연결하기도 한다. 또 단순한 행사 기획을 넘어 지역의 스토리텔링 자산을 보호하고 다음 세대에 전하는 중추적 역할도 한다.
사실 그동안 경산시의 문화예술 사업은 주로 행정 주도의 행사로 진행됐다. 민간 단체가 이를 보완해왔지만, 전반적으로는 체계성과 지속성이 부족했다.
경산문화관광재단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전문적 기획과 연구, 실행력을 바탕으로 시민의 다양한 문화예술 수요에 대응하는 전담 기구로서 역할을 할 계획이다. 단순한 '행사 도시'를 넘어 생활 속 문화와 관광이 공존하는 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경산시 민선8기와 함께 탄생한 경산문화관광재단. 지역민의 수요에 맞춘 문화관광 행정을 위해 설립됐다. 사진은 경산문화관광재단 사무실의 모습.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아우르는 문화와 관광, 함께하는 경산
시민들의 문화생활에 대한 관심과 욕구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공연, 전시, 체험, 관광 등 다양한 장르에서의 참여 요구가 커지고 있으며, 이는 도시 경쟁력에도 직결된다.
경산문화관광재단은 이러한 수요를 뒷받침하기 위해 질 높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지역 예술인과 단체의 창작 활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한다. 특히 시민이 직접 참여하고 경험할 수 있는 참여형 문화예술 콘텐츠를 확대해 문화 향유의 기회를 더욱 넓혀 나갈 계획이다.
문화와 관광은 다르지 않다. 지역의 독창적인 문화 콘텐츠는 관광 자원이 되고, 관광객의 방문은 다시 지역 문화의 확산과 재생산으로 이어진다. 경산문화관광재단은 이 같은 문화-관광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는 핵심 축이 된다. 재단의 성공적인 운영은 경산시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는 동시에, 경산을 대구·경북권을 대표하는 문화관광 도시로 성장시키는 발판이 될 것이다.
메노나이트가 남긴 정신은 단순한 경산의 과거가 아닌 '지속 가능한 문화 도시' 경산의 미래를 위한 자산으로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글=박준상기자 junsang@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박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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