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 소설가로 살아간다는 것

  • 우광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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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9-18 06:00  |  발행일 2025-09-17
우광훈 소설가

우광훈 소설가

예전, 서울의 한 대형출판사와 장편소설을 계약한 적이 있었다. 최종수정원고를 보내던 날, 난 이번 소설의 정확한 출간일이 언제인지 알고 싶다는 내용의 메일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기대에 찬 마음으로 답신을 기다렸다. 이틀 뒤, 드디어 메일이 도착했다. 그런데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출판사 내부 사정으로 인해 내 소설 출간이 내년으로 미뤄졌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구체적인 내년이 아니라 막연한 내년. 또한 내 소설원고에 대한 그 어떤 피드백이나 한 줄의 단상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난 출판사의 경영상태가 좋지 않거나, 편집부 내부에 뭔가 복잡한 변화가 생겼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원고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런 식의 우회적인 내용의 답장을 보낸 게 아닐까하는 불안과 의심을 지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출간일이 연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존심이 상할 때로 상해버린 난 출간계약을 파기하고 싶다는 내용의 메일을 출판사에 보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내 원고의 담당편집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이와 같은 경우 우리 출판사는 대부분 작가의 의사를 존중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아릿했다. 편집자는 다시, 자신이 그동안 무례한 게 있었냐고 나에게 물었고, 난 아니라고, 너무 고마웠다라고 대답했다. 사실이었고, 진심이었다.


전화통화가 끝나고, 난 곧장 작업실로 기어들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답잖은 소설 하나에 내가 너무 건방을 떤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작가들이 선망하는 출판사였고, 출판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을까하는 후회도 일었다. 하지만 이런 무관심과 조바심으로 뒤범벅된 악몽 같은 과정들을 견뎌가며 출판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푸념 어린 목소리가 더욱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과연, 내가 또 다시 1년을 인내할 수 있을까? 아니 2년이, 3년이 될지도 모르는 그 기약 없는 시간들을…….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 권의 작품집을 갖게 된다. 힘들게 원고를 완성하고, 끊임없이 출판사에 투고하고, 우여곡절 끝에 출판사가 정해지면 원고의 방향과 출간일정에 관해 진지하게 상의하고, 예정된 출간일이 가까워지면 미지의 독자들을 떠올리며 한껏 기대에 부풀고, 하지만 뜻하지 않은 사정으로 출간일이 연기되고, 그렇게 다시 기다리고…….


나 역시 이런 지난한 과정으로 인해 문학을 대하는 태도나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소수의 열광적인 독자들과 소통하길 원하는 컬트적인 작가에서, 다수의 일반 독자들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대중적인 작가로. 속되게 말하자면 베스트셀러작가가 점점 부러워졌다. 정도(正道)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내면에서 꿈틀대는 이 기형적인 욕망과 적의에 난 저항할 수 없었다. 그렇게 차돌처럼 단단했던 나의 작가정신은 점점 물렁해지고 쪼그라들어 결국 나를 파멸로 이끌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난 가끔 문학 관련 잡지나 유튜브 방송에서 젊은 작가들이 '많은 독자들과 함께 소통할 수 있는, 그런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며 미소 짓는 모습을 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것은 어쩌면 나 같은 예술을 핑계로 살아가는 소설가들에겐 영원히 풀 수 없는 난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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