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내 주장 옳다고 밀어 붙이면 안돼…줄 것 주고 실현 가능한 부분 챙기는 게 정치”

  •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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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9-17 16:22  |  발행일 2025-09-17
10대 후반에 집안 일으키려 서울행
청계천 세운상가서 가스 배달 막일
먹고 살만 해지면서 봉사에 눈돌려
“도시 주민안전은 예방이 가장 중요”

▮출향인사를 찾아서/ 영양 출신의 남창진 서울시의회 전반기 부의장



영양 출신의 남창진 서울시의회 전반기 부의장이 고향 영양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김은경 기자

영양 출신의 남창진 서울시의회 전반기 부의장이 고향 영양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김은경 기자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서울로 간 소년은 어느덧 서울시민의 대표가 됐다. 10대 때부터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가스통을 나르던 소년은 지역 봉사와 정치를 통해 주민의 신뢰를 얻었고, 지금도 '억지보다 합리, 나보다 남'이라는 소박한 철학을 지키며 의정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경북 영양 출신의 서울시의회 남창진 전반기 부의장의 삶에는 한 세대의 굴곡진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첩첩산중 오지' 영양의 아들


"쌀밥 한 숟갈이 그리운 시절이었어요. 보리쌀에 조금씩 섞여 들어간 쌀이 귀해서, 그거 한 톨이라도 집어먹으면 그렇게 행복했죠."


경북 영양군 청기면에서 태어난 남창진 서울시의원의 어린 시절은 지독하게 가난했다. 늘 배가 고팠고, 학교를 가기 위해 매일 8㎞ 산길을 걸었다. 제때 학비조차 내지 못해 눈칫밥 먹기가 여사였다.


집안의 장손이었던 그는 어린 나이에도 스스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큰아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아들아, 이 산골에 있으면 달라질 것이 없다. 차라리 굶더라도 넓은 세상으로 나가라. 네가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


그 말 한마디에 그는 결심을 굳혔다. 산에서 소나무를 해 팔아 모은 1천100원을 들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아직 부모 품이 그리울 10대 후반이었다.


서울에 도착해 처음 발을 디딘 곳은 세운상가였다. 두려움에 떠는 시골 아이에게 역시나 도시는 무서운 곳이었다. 야바우꾼들에게 속아 순식간에 가진 돈을 모두 털렸다. 하지만 좌절할 수 없었다. 그는 세운상가 인근 프로판가스 가게에 취직해 무거운 가스통을 자전거에 싣고 나르며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제 몸보다 무거운 가스통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던 시절, 그의 어깨에는 늘 멍이 가득했다. 하지만 성실함과 정직함으로 인정받아 점포를 관리할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3년 뒤, 그는 직접 석유 판매업에 뛰어들었다. 중동 전쟁과 석유 파동의 혼란 속에서 발로 뛰며 거래처를 늘려나갔다. "은행도, 자본도 없었어요. 오로지 신뢰 하나로 버틴 거죠."



영양 출신의 남창진 서울시의회 전반기 부의장이 고향 영양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은경기자

영양 출신의 남창진 서울시의회 전반기 부의장이 고향 영양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은경기자

큰 키와 봉사로 얻은 별명 '키다리 아저씨'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자, 그는 자연스레 봉사로 눈을 돌렸다. "물질로 다 갚을 수는 없잖아요. 제가 도움받아 여기까지 왔으니 저도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이웃을 찾아 나눔을 실천했다. 크고 작은 후원은 물론, 직접 장애인 시설이나 노인 시설을 찾아다니며 노력봉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키가 1m80cm가 넘는 큰 체구 덕분에 주민들은 그를 '키다리 아저씨'라 불렀다. 서울 송파구에서 그는 '사람 좋고 성실한 아저씨'로 통했고, 이는 의정 활동에서도 힘이 되었다. 봉사활동은 바르게살기운동 협의회로 이어졌고, 이를 토대로 자연스럽게 지역 사회에 뿌리를 더욱 깊게 내렸다.


"정치? 사실 저도 잘 몰랐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저를 믿어주고, 제가 뭔가 할 수 있다는 기대가 커져서 그 길로 들어서게 된 게 아닐까요?"


의원으로서 그는 보여주기식 인기를 쫓기보다 실질적 성과를 중시했다.


"행사에 예산 조금 따 와서 이름 올리는 일, 그건 제 성격에 안 맞습니다. 대신 꼭 필요한 일, 주민들에게 남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그는 방이동 복합청사 건립 과정에서 주차장 확보 문제를 집요하게 챙겼고, 115억원의 예산을 확보해냈다. 주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생활 정치에 힘쓴 것이다.


그의 정치 터전인 송파 제2선거구는 서울 강남에서 비교적 조용하고, 안정적인 곳으로 손꼽히는 지역이다. 석촌호수와 올림픽공원이 있으며, 국제관광특구와 재래시장인 방이시장과 올림픽아파트 등이 있어 누구나 살고 싶어 한다.


남 의원은 조례 제정에서도 안전과 복지에 초점을 맞췄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경계선 아이들'을 위한 조례, 시민 안전 교육 관련 조례 등이 대표적이다. "도시 안전은 예방이 가장 중요합니다. 막을 수 있는 사고는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또한 그는 재건축과 도시개발에서도 '100년 대계'를 강조했다. "업자들의 이익만 좇는 아파트가 아니라 작품성 있는 건축물이 들어서야 합니다. 송파는 국제관광특구이니 건축물 자체가 관광 자원이 될 수도 있거든요."



영양 출신의 남창진 서울시의회 전반기 부의장이 의정활동을 하던 중 포즈를 취했다. <남창진 의원 제공>

영양 출신의 남창진 서울시의회 전반기 부의장이 의정활동을 하던 중 포즈를 취했다. <남창진 의원 제공>


"정치, 내 주장 옳다고 밀어 붙이면 안돼"


그의 정치 철학은 간단하다. 억지보다는 합리, 나보다는 남이다.


"내 주장이 옳다고 밀어붙이면 안 됩니다. 상대 얘기를 듣고, 그중 실현 가능한 부분을 챙기는 게 정치죠. 열 가지를 주장해 하나도 못 얻느니, 다섯 가지 듣고 세 가지라도 실현하는 게 낫습니다."


산골에서 배운 끈기와 사람에 대한 배려는 지금도 그의 원칙이다. "나는 성격이 급하고 모난 구석도 있지만, 남들이 편해야 내가 편하다는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그게 제 삶을 지탱해 준 힘입니다."


고향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조금씩 말투가 느려졌다. 그는 지금도 고향 영양을 잊지 않는다. 서울 생활 초기, 고향이 그리울 때면 청량리역에서 떠나는 마지막 기차를 보며 홀로 눈물을 훔쳤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명절에도 집에 가지 못하고 부모님께 돈을 동봉한 편지만 부쳤던 기억도 잊을 수가 없다.


"보고 싶은 사람, 가고 싶은 고향은 늘 있었죠. 그래도 참고 버텼습니다. 제가 쓰러지면 가족이 다 쓰러지니까요. 하지만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가고 싶지 않아요. 정말 너무 배고프고, 힘들고 가난했던 날들이었어요."


무일푼으로 서울에 올라와 가스 배달부터 시작해 석유 사업, 그리고 서울시의회에 이르기까지. 남창진 의원의 삶은 그 자체로 도전과 극복의 연속이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를 믿어준 분들께 보답하려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앞으로도 봉사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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