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순의 문명산책] 낯선 얼굴을 마주할 때

  •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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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0-17 06:00  |  발행일 2025-10-16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피타고라스와 이븐 시나, 서로 낯선 얼굴들이 마주했다.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출신의 수학자다.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 제곱의 합과 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현(絃)의 길이와 음정 사이의 비례를 밝혀 우주를 '수(數)적 질서'와 '조화의 원리'로 파악했다. 이븐 시나는 11세기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출신의 의사다. 아비센나라고도 불리는 그는 음악이 수학적 비례를 넘어 인간의 정서와 영혼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주목했다. 그리고 자신의 저서 '의학전범'과 '치유의 책'을 통해 중세 이슬람권의 압도적인 지적 풍경을 고스란히 펼쳐 보였다. 특히 음악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정신과 의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학문임을 강조하여 훗날 스콜라 철학과 르네상스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이븐 시나에게 음악은 감각과 지성과 감정을 잇는 다리였다. 그는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이 불러일으키는 여운에 주목했다. 그것은 인간이 서로를 부르는 방식이자 고통을 달래는 도구이며, 우주와 연결되는 감각적 통로였다. 소리의 일회성이 그 열쇠다. 소리는 울리자마자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에 생긴 침묵은 다음 소리를 위한 기다림이 된다. 긴장과 이완, 결핍과 회복의 순환이 반복될 때 듣는 사람은 깊은 감정의 동요를 경험한다. 그에게 소리는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었다. 새들의 지저귐이 생물학적 소통의 단계라면, 인간의 언어는 사회적 약속의 산물이다. 그러나 음악은 그 위에 자리한다.


이븐 시나는 이러한 감정적 흐름이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을 건드린다고 했다. 음악은 단순한 음의 배열이 아니다. 감정의 시간적 구조를 설계하는 고도의 기술이다. 이 감정적 흐름의 여운이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그는 예리하게 포착해냈다. 그것은 서양 고전 음악의 미학적 뿌리가 되었다. 그 뿌리에 중세 이슬람이 숨어 있다.


중세 이슬람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거장들의 예술을 꽃피게 했다. 바흐의 대위법에서 드러나는 '질서'가 그러하다. 여러 성부가 제각기 흘러가다가도 하나의 조화로 귀결되는 순간의 전율, 혼돈 속에서 드러나는 신비한 균형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계산된 구조가 인간의 정서와 맞닿는 마법 같은 울림을 경험하게 된다. 베토벤의 교향곡에서 드러나는 '긴장'도 마찬가지다. 휘몰아치는 듯한 소리의 흐름이 순간적 정적으로 강렬한 에너지를 응축시키는 장치가 된다. 그것이 반복적으로 삽입되어 듣는 이의 집중력을 극도로 끌어올린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에서 드러나는 '기만적 반전'은 질서와 긴장이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는 경우이다. 모든 것이 안식으로 끝날 듯 감정을 몰아가다가도, 마지막 순간의 긴장된 종지가 예상과 달리 빗나가며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 이 불완결의 충격은 억눌린 감정을 폭발시키고, 마침내 영혼의 가장 은밀한 문을 두드린다. 카타르시스다.


영혼을 움직이게 만드는 질서, 침묵, 그리고 기대를 지연시키는 반전의 기법은 사라져버리는 시간의 특징을 이용한 것이다. 음악은 사라지는 시간의 예술이지만, 사라지면서도 인간과 문명을 새롭게 빚어왔다. 소리가 사라지는 찰나, 그 덧없음 속에서야 비로소 울림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미 천년 전에 포착해냈다. 피타고라스의 수(數)와 이븐 시나의 영혼이 어우러져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가는 신비로운 순간, 낯선 얼굴들이 서로 마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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