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윤 국립경국대 부총장
나라가 어렵다. 성장의 엔진은 식어가고, 신냉전의 파고는 거세다. 지역도 어렵다. 필자가 살고 있는 지역도 도청 신도시라는 기회를 얻었지만, 생활권과 산업기반을 잇는 데 실패하며 다시 침체의 골로 미끄러지고 있다. 이럴 때 선인들은 "국난 사현신(國難 思賢臣), 가빈 사양처(家貧 思良妻)"하라 했다. 위기의 본질은 제도가 아니라 사람, 곧 '현명한 리더십'의 부재에 있다는 간명한 진단이다.
우리는 나라가 어려울 때 '충신'을 떠올린다. 그러나 선인들은 충신이 되기보다 현군의 양신이 되기를 원했다. 실제 역사는 말한다. 난국에 충신이 몸을 버려 충을 얻었지만, 나라와 백성을 어려움에서 구하지는 못하였다고. 충신보다 현신이 필요한 이유이다.
국가와 지역의 어려움 속에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을 생각한다. 약포는 필자가 기리는 현신의 표상이다. 임진왜란 당시 임금은 역사상 보기 드문 혼군(昏君)이었고 조정은 분열했으며 국운은 풍전등화였다. 이 어둠에서 약포가 보여준 것은 '충(忠)의 비장미'가 아니라 '현(賢)의 냉정미'였다. 그는 감정의 칼 대신 이성의 붓을 들었다. 분조(分朝)를 실질적으로 지탱해 국정의 줄기를 끊기지 않게 했고, 민심이 떠난 빈자리를 통치의 신뢰로 조금씩 메웠다. 그의 현명함이 있었기에 나라는 다시 일어설 여지를 얻었다.
이순신 장군을 구명한 상소는 현신의 결정판이다. 약포는 전황의 국면을 읽었다. 한 사람의 구명이 곧 한 나라의 존망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감정이 아니라 판단으로 통찰했다. 그래서 그는 혼군의 노여움을 무릅쓰고 이순신 장군을 구명했고 현명하였기에 몸을 다치지 아니하였다. 이순신 장군을 살리고 조선을 다시 살렸다. 만약 그가 충의 감정에 앞서 혼군의 뜻을 거슬렀다면 이순신 장군도 구하지 못하고 단지 '비극의 충신'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의 냉철한 현명함은 그를 비장보다 어려운 절제의 미덕으로 기억하게 했다.
약포가 현신인 것을 보여주는 경세관은 그의 저서에서 한 문장으로 표현된다. "살갗에 생긴 병을 고치지 않아 배 속까지 번진 뒤에야 고치려 한다면 위태로움을 면치 못한다." 문제는 초기 징후에서 다스려야 한다는, 단호하고도 절제된 국가 운영의 원칙이다. 이 문장은 오늘도 유효하다. 정치의 감정화와 정책의 이벤트화가 일상화된 지금 약포의 충언은 더욱 의미가 있다. '지금 고치라'는 그의 언어는, 위기에 대응하는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친다.
내년은 약포 탄신 500주년이다. 이 시점에 우리는 약포를 얼마나 알고 있나 묻고 싶다. 서애 못지않은 표상이지만 약포의 행적은 교과서의 짧은 문장으로 설명된다. 그의 정신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국난의 순간에 드러난 '경세의 지혜'를 잊으면 다시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약포를 다시 조명하고 선양해야 하는 이유이다. 선양은 단지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선양은 약포의 정신과 마음으로 국가와 지역을 보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공적 언어의 기준을 약포의 문장으로 다듬고, 리더십의 잣대를 약포의 품격으로 재정렬하는 일이다.
국난에는 사현신, 가빈에는 사양처. 국가와 지역이 동시에 흔들리는 오늘, 우리는 이 간명한 격언을 다시 손에 쥐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해야 한다.
약포를 기념하지 말고, 약포처럼 행동하자. 그때 비로소 약포 선양은 과거의 의례가 아니라 미래의 약속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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