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珍의 미니 에세이] 디 앤드(The End)

  • 박기옥 수필가·대구문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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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2-04 18:57  |  발행일 2025-12-04
박기옥 수필가·대구문인협회 부회장

박기옥 수필가·대구문인협회 부회장

"경상도 남자들은 워딩에 약한 편이다"라고 하면 더러는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겠지만 5분만 참고 들어보시라. 내 친구네 집 이야기다.


친구의 딸 순이는 할아버지, 아버지, 오빠 모두가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말 두 마디를 안 하는 남자들이라 자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싹싹하고 연한 남자와 결혼하리라 마음먹었다. 내 친구 순이 엄마 역시 입에 곰팡내 나는 남자 몸서리난다고 사위만은 속 시원한 남자를 보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혼처가 나타났다. 외모도 단정하고 직장도 탄탄한, 무엇보다 경상도 남자 같지 않게 나긋나긋하고 세련된 신랑이라 하여 순이를 꽃단장시켜 총각이 기다리는 카페로 내보냈다.


점심을 같이 하고 커피도 마신 순이가 돌아왔는데 표정이 밝지 않았다. 말이 너무 많더라는 것이었다. 가족끼리 집에서 식사할 때는 화난 사람들처럼 밥그릇만 끌어안고 먹어서 불만이었는데 이 남자는 어찌나 잔망스러운지 음식마다 시시콜콜 입을 대면서, "찬 음식이 식욕을 돋우거든요. 이것부터 드세요" "고기가 너무 익은 것 같아요. 채끝살은 미디엄이 좋은데" "이 음식은 뜨거울 때 먹는 게 좋아요. 식기 전에 드셔보세요" 하는 통에 숟가락을 확 집어던지고 싶더라는 것이었다.


순이 엄마가 딸을 달랬다. 튀어나온 입을 쥐어박기까지 했다. 연애도 못하는 주제에 제 분수도 모르고 까탈을 부린다고 딸을 윽박질렀다. 싫다는 딸을 삼세판은 만나봐야 후회 안 한다며 이번에는 영화도 한 편 보고 오라고 내쫓듯이 해서 보냈다.


딸이 영화관에서 돌아왔다. 연인들의 시간인 저녁 무렵이라 예감이 좋지 않았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며 영화 본 소감이라도 나누지 않고? 방까지 따라 들어갔더니 순이는 물부터 크게 한 잔 벌컥벌컥 들이켰다.


"엄마."


영화를 보는데 눈이 아닌 입으로 보더라고 했다. 배우와 감독이 어떻고, 스폰서는 누구이며, 제작비는 얼마 들었고.


한순간 조용하기에 돌아보았더니 영화는 클라이막스인데 정작 총각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영화가 끝나고 화면에 'The End'라는 자막이 뜨자 잠을 깬 총각이 큰 소리로 '더 앤드!'라고 읽는 것이 아닌가. 그의 입은 눈과 동시에 자동으로 열리는 모양이었다. 잠결이었는지 실수였는지 '디 앤드'가 '더 앤드'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힐끔힐끔 총각을 돌아보았다. 간간이 킥킥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결국 그 총각과 '디 앤드'한 순이는 오빠와 판박이인 오빠 친구와 결혼했다. 지난 주말에 길에서 우연히 만나 커피를 한 잔 마셨는데 즈네 엄마와 똑같이 곰탱이 남편을 지겨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남편과 '디 앤드'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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