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다저스 오타니 쇼헤이가 경기 시작 전 몸을 풀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월드시리즈는 역대급 화제를 낳았고, 그 중심에는 바로 일본인인 '오타니 쇼헤이'와 '야마모토 요시노부'가 있었다. 한국에서도 여러 스포츠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이 두 선수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다만 세대에 따라서 역시 온도차는 조금 존재하는 것 같은데, 아무런 편견 없이 이 일본인 선수들에게 열광하는 젊은 세대와는 달리 나와 같은 아재 세대는 박수는 보내면서도 약간은 불편하고 심드렁한 측면이 없지는 않아 보였다. 지금 한국 야구는 죽을 쑤고 있는데, 한때는 거의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던 일본 선수들이 잘 나가는 것을 보니 마냥 속이 좋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가 이런 '꼴통 마인드'에 빠질 때마다 여러 철학자들을 불러내어 회초리를 맞는다. 가장 먼저 떠오른 신경질적인 선생님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다. 그에 의하면 이 세상의 자긍심 중에 가장 천박한 것이 바로 민족적 자긍심이다. 오직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멍청한 인간들만이 자기 민족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타 민족을 폄훼하거나 질투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보다 선배였던 임마누엘 칸트는 심지어 선수의 민족이나 국적 따위에 애초 관심도 가지지도 말라고 회초리를 들 것이다. 아니 그에 의하면 그뿐 아니라 오타니의 잘생긴 외모, 야마모토의 성실한 성격 등도 고려 대상이 아닐 것이다. 나아가 그 두 선수의 실존 자체에도 관심을 가져선 안 된다. 오로지 그들이 승리에 기여한 엄밀한 숫자만을 판단의 척도로 삼으며 그들 퍼포먼스가 가진 '야구미(野球美)'적 형식을 순전하게 관조하는 것만이 진정한 월드시리즈의 관람법이라는 가르침이 이어질 것이다.
칸트가 너무 핍색해서 숨이 막힌다면, 그보다 살짝 선배였던 데이비드 흄을 한 번 들여다보도록 하자. 흄은 칸트와는 정반대로 이성보다 감정을 앞에 두던 철학자였다. 즉, 그는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판단 자체도 감정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봤다. 그의 판단에 따르자면 오타니나 야마모토는 그 자체로 '선'에 가까운 유형의 인물들이다. 그들의 본질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인들이 그들의 승리를 향한 열정, 동료애, 성실함 등에 깊은 공감을 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국지적으로는 토론토의 팬들이나 나 같은 한국 아재들처럼 그 두 일본인을 '악'으로 규정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흄에 의하면 오랜 경험과 다수의 공감에서 나오는 '일반적인 관점'은 소수의 관점보다 훨씬 윤리적이다. 물론 이것이 매우 불안정한 도덕관이라는 것은 흄 스스로도 인정한 바 있다.
감정의 철학으로 흄보다 선배였던 스피노자는 외부 환경에 의해 우연히 찾아오게 되는 '수동적 감정'이 우리 인간을 모종의 노예로 만드는 원흉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수동적인 감정은 다분히 파쇼적으로 흐르기 쉽다. '일본'이라는 기표가 한국인들에게 조건반사적으로 주는 공포감과 콤플렉스, 복수심과 혐오 감정 등이 그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우리가 이러한 수동적 감정에 지배를 당하는 동안은, '더 나은 길을 알면서도 나쁜 길을 따르는 우'를 범할 것이라 경고한다. 그래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능동적 감정을 가지는 것은, 진정 월드시리즈를 '자유롭게' 관람하기 위한 첫걸음이 된다.
일본 야구선수들의 이야기를 했지만, 이건 사실 어디를 향해서나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다. 누군가에게 위의 글의 '일본'은 '모 국가'나 '특정 집단' 혹은 '어떤 당'으로 바꾸어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마지막으로 철학이라는 회초리는 언제나 지적 치매의 훌륭한 예방접종일 수 있다는 것을, 나를 포함 모두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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