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추 거문고 이야기] <46> 거문고와 줄풍류

  •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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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2-04 18:57  |  발행일 2025-12-04
혜원 신윤복(1758~1814) 작 상춘야흥. 줄풍류 중심 악기인 거문고·대금·해금 연주자들이 연주를 준비하고 있는 장면인 듯하다. <간송미술관 소장>

혜원 신윤복(1758~1814) 작 '상춘야흥'. 줄풍류 중심 악기인 거문고·대금·해금 연주자들이 연주를 준비하고 있는 장면인 듯하다. <간송미술관 소장>

줄풍류는 현악기로 연주하는 풍류 음악을 말한다. 거문고가 중심이 되며, 영산회상 가락을 주로 연주한다. 영산회상은 거문고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거문고회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줄풍류는 방 안에서 연주하는 조용한 음악으로 발전했고, 방중악(房中樂)이라고도 했다.


풍류라는 말은 전통 음악과 관련된 용어로도 많이 쓰이고 있다. 줄풍류, 대풍류, 풍류방, 풍류객 등이 그것이다. 줄풍류와 대풍류는 악기편성의 차이에 따른 구분이고, 풍류객은 풍류 음악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풍류방은 풍류객들이 모여 풍류 음악을 연주하며 즐기는 공간을 말한다. 그리고 이 풍류는 정악(正樂)을 말한다. 속악(俗樂)과 구별하여 사용된다. 정악은 궁중과 상류층에서 연주하던 음악으로, '아악(雅樂)'이라고도 한다.


풍류 음악으로 분류하는 것에는 줄풍류의 현악영산회상, 대풍류의 관악영산회상 등이 있다. 또 성악으로 하는 가곡·가사·시조도 풍류 음악에 속한다. 줄풍류는 거문고를 중심으로 현악영상회상을 연주하는 것을 말하고, 대풍류는 피리, 대금, 해금 등 대나무 관악기가 중심인 풍류음악이다.


이중에서 특히 풍류의 속성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 음악은 줄풍류의 영산회상과 줄풍류 편성의 반주를 함께 하는 가곡이다. 이 음악은 주로 여유있는 양반층에서 교양으로 하던 음악이다.


줄풍류는 거문고·가야금·해금·세피리·대금·장구 연주자 각 한 명씩으로 편성하는 것이 기본이다. 단소와 양금이 추가되기도 한다.


영산회상은 본래 불교적인 가사 '영산회상불보살'을 노래하던 것인데, 그것이 시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유교의 음악가치관의 영향으로 아악과 같은 성격으로 발달하게 됐다. 본래는 불교적인 것이었지만, 유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민속음악과 같은 음계·장단·형식의 양식으로 발달한 음악이 영산회상이다.


이러한 풍류는 그것을 통해 사사로운 마음을 다스리며 인격을 도야하고 수양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도 쓰였지만, 또 한편 현실을 달관하고 유유자적하면서 은거하는 선비들의 취미로도 각광을 받았다. 그래서 옛 선비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이 줄풍류와 가곡 같은 교양음악이었다.


◆풍류방


일명 '율방(律房)'이라고도 한다. 조선 말기 가곡, 가사, 시조 등 성악곡에 능통했던 사람들을 가객(歌客)이라 불렀고, 가곡 반주나 영산회상 등의 기악곡에 뛰어난 거문고 연주자를 금객(琴客)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가객과 금객이 함께 어울려 풍류를 즐기던 곳을 풍류방이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중인 출신들이 새로운 음악 수용층으로 등장했고, 이들이 풍류방을 중심으로 음악활동을 벌였다. 정악이라는 새 갈래의 음악문화가 중인 출신 음악 애호가들에 의하여 형성됐다.


숙종 말 무렵 가객 김천택과 금객 김성기는 대표적인 풍류방의 풍류객이었다. 양반 사대부 못지않게 많은 지식을 지닌 중인 출신의 풍류객들은 그들이 연주하던 악곡들을 거문고 악보로 후세에 남겼다. 이득윤의 '현금동문유기'(1620), 김성기의 '어은보'(1719), 작자 미상의 '한금신보'와 '신작금보'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풍류방에서 악기를 연주하던 사람을 율객 또는 풍류객이라 했다. 조선조 후기 및 20세기 전반기에 풍류방, 율방, 율회 등의 모임에서 여러 사람과 어울려 거문고, 가야금 등의 악기를 연주하던 사람으로 비전문 음악인이 많았다. 이들은 영산회상이나 가곡과 같은 아정한 음악을 즐겼다.


조선 전기에 신분이 높은 사대부들이 인격 완성의 도구로서 거문고와 같은 악기를 연주했으나, 이들을 율객이라 하지 않았다. 율객은 풍류가 발달했던 조선 후기에 풍류방에서 여러 사람과 어울려 악기를 연주했던 풍류객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율객은 대체로 조선 후기에 풍류방에 모여 악기, 특히 거문고와 같은 현악기를 연주하던 사람을 총칭하며, 전문 음악인보다는 직접 악기를 연주하며 풍류를 즐긴 비전문 연주가가 많았다. 전문 연주가 역시 율객에 속했으나, '금사(琴師)'라 하여 구별하기도 했다. 전문 연주가인 금사는 대부분 중인이거나 평민이었다. 신분이 높은 사대부나 선비들이 인격 수양을 위해 거문고를 연주했으나, 그들은 전문 연주가이면서 연주법을 가르쳤던 금사와는 구분됐다. 금사 대부분이 거문고 전문 연주가였다.


조선 후기에 풍류가 발달하면서 인격 수양뿐 아니라 음악을 통해서 교유하는 풍류방 문화가 확산되면서 일반 선비와 중인들까지 율객으로 보았다. 거문고를 연주했던 김홍도, 가야금을 연주했던 홍대용 등이 조선 후기 율객에 해당하며, 많은 선비들이 율객이었다. 20세기에도 여러 지방에 있었던 율회, 율계 등의 풍류방에 참여한 율객이 많았다. 직업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풍류를 즐기던 이들은 조선 후기 풍류방 문화의 전통을 이어갔다.


20세기 전반기의 율객은 조선 후기 풍류의 전승 주체였고, 그들이 즐겼던 음악 중 일부가 향제 풍류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가객 중심의 풍류방에서는 가곡·가사·시조를 주로 불렀고, 율객 중심의 풍류방에서는 영산회상 같은 기악합주가 연주됐다. 기악합주를 연주하던 풍류방을 율방(律房)이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 풍류방의 모습을 1884년 한양거사는 그의 '한양가'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금객 가객 모였구나/ 거문고 임종철이/ 노래에 양사길이/ 계면에 공득이며/ 오동복판 거문고는/ 줄 골라 세워놓고/ 치장 차린 새 양금은/ 떠난 나비 앉혔구나/ 생황 퉁소 죽장고며/ 피리 저 해금이며/ 새로 가린 큰 장구를/ 청서피 새 굴레에/ 홍융사 용두머리/ 단단히 죄어 매고/ 태극 그린 큰북 가에/ 쌍룡을 그렸구나/ 화려한 거문고는/ 안족을 옮겨 놓고/ 문무현 다스리니/ 농현 소리 더욱 좋다/ 한만한 저 다스림/ 길고 길고 구슬프다/ 피리는 춤을 받고/ 해금은 송진 긁고/ 장고는 굴레 죄어/ 더덕을 크게 치니/ 관현의 좋은 소리/ 심신이 황홀하다/ 거상조 내린 후에/ 소리하는 어린 기생/ 한 손으로 머리 받고/ 아미를 반쯤 숙여/ 우조라 계면이며/ 소용이 편락이며/ "춘면곡" "처사가"며/ "어부사" "상사별곡"/ "황계타령" "매화타령"/ 잡가 시조 듣기 좋다/ 춤추는 기생들은/ 머리에 수건 매고/ "상영산" 늦은 춤에/ "중영산" 춤을 몰아/ 잔영산 입춤 추니/ 무산선녀 내려온다/ 배따라기 북춤이며/ 대무 남무 다 춘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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