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전쟁 발발 사흘 뒤인 28일 밤, 대구는 이미 수십만명의 피란민으로 북적댔다.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전란을 피해 앞다퉈 대구로 향한 것이다. 당시 대구는 '안전지대'로 여겨진 부산으로 가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그해 7월16일부터 33일간 대구는 임시수도가 됐다. 현재 공원으로 지정된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이 당시 임시 정부청사로 쓰였다.
전란 속 한 달여간 대구는 사실상 대한민국의 중심지였다. 피란민들로 인해 당시 대구 인구는 40여만명에서 삽시간에 70만명으로 불어났다. 도시가 무질서해질까봐 정책 입안자들은 시민과 피란민의 상호 협조를 호소했다. 식생활·복장·주거 등 생활 전반에서 절제와 자제를 당부하는 '전시 국민 생활요강'도 만들어 배포했다.
급격한 인구 증가는 식수난·식량난·주택난을 초래했다. 당시 대구엔 피란민에게 제공할 주거지가 1만호도 채 되지 않았다. 특히 1950년 12월 말부터 운영된 피란민 수용소는 10여 평 남짓한 공간에 불과했다. 150여명이 콩나물 시루처럼 지냈다. 수용소에 가지 못한 이들은 도시 외곽의 빈터를 돌며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대구 피란민촌'을 형성했다.
1953년 7월27일 휴전으로 민족상잔의 비극이 끝나면서 대구에 머물던 피란민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상당수는 그대로 눌러앉았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했다. 이 말대로라면 2025년 12월까지 대구는 일곱 번이나 강산이 바뀐 셈이다. 지금은 당연히 대구 피란민촌의 옛 모습을 실물로 보긴 힘들다. 후문(後聞)으로만 조금씩 전해질 뿐이다.
대구 피란민촌 터는 북구 복현1동, 서구 평리1동, 달성군 하빈면 등 서너 곳으로 파악된다. 오랜 세월 방치됐던 이 지역들은 뒤늦게 도시재생을 통해 새롭게 변모했다. 영남일보는 대구시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대구 피란민촌의 흔적을 75년 만에 찾아가본다. 아파트숲으로 변모된 도심 속에서 흐릿해진 그때의 기억과 함께 소담한 미래를 조망해 본다.
조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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