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추 거문고 이야기] <47·끝> 김정애와 대구 풍류방

  •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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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2-19 06:00  |  발행일 2025-12-18
1950년대 말엽에 대구 조양여관에서 열리던 풍류방에 참여했던 김정애의 거문고 연주 모습. 그는 1960년 포항 동지여중고 교사로 발령받으면서 대구를 떠났고, 1964년부터는 남편을 따라 진주에 가서 국악활동을 펼쳐나갔다. <김정애 육필풍류현금보집>

1950년대 말엽에 대구 조양여관에서 열리던 풍류방에 참여했던 김정애의 거문고 연주 모습. 그는 1960년 포항 동지여중고 교사로 발령받으면서 대구를 떠났고, 1964년부터는 남편을 따라 진주에 가서 국악활동을 펼쳐나갔다. <김정애 육필풍류현금보집>

거문고를 중심으로 한 국악 풍류객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던 풍류방은 전국 곳곳에서 운영되다 20세기 후반에 점차 사라져갔다.


대구 풍류방은 1960년대까지 몇 군데(대구 시내의 조양여관과 성주여관, 금호강변의 금호정)에서 운영되었던 것 같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까지 대구풍류방을 드나들며 거문고 풍류를 배우고 풍류방 모임에도 참여했던 매성(梅城) 김정애(1938~2008)가 남긴 기록 '김정애 육필풍류현금보집(金貞愛 肉筆風流玄琴譜集)'<2007, 매성국악무용보존회>의 내용을 중심으로 대구 풍류방의 일면을 살펴본다.


◆조양여관 풍류방


매성(梅城) 김정애는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고, 대구 효성여대(대구가톨릭대) 불문학과를 졸업했다. 대구에서 국악을 배우고, 1964년부터는 남편의 근무지(진주여고)인 진주로 가서 국악연주자와 전통 춤꾼으로 활동했다. 1970년부터는 진주 풍류방 모임에 참여하며 활동했고, 1996년부터는 중요무형문화재 '구례향제 줄풍류(거문고)' 예능보유자로 활동했다.


그녀는 1955년 초 대구 종로에 있던 'ㄷ자형의 멋스럽고 대단한 규모의 한옥'인 조양여관(오금당 조소남 자택) 아래채에서 조소남에게 양금 교습을 받으며 국악의 멋을 알아갔다. 김정애는 양금 풍류 전바탕을 배운 후 대학에 입학하던 해인 1956년 초, 조양여관의 본채에서 양금 스승이던 조소남과 함께 호석 임석윤에게 거문고 풍류를 전수받게 된다.


그 전인 16세 때 대구에서 한국춤 명인 박은희(본명 박순조)에게 한국춤 전반과 장구 구음을 배웠다. 스승(박은희)의 권유로 조소남을 사사해 양금 풍류 전바탕과 가야금산조를 전수받았다. 이후 임석윤에게 거문고 풍류(영산회상) 전바탕을 배웠다. 4년 동안 거의 매일 조소남과 함께 임석윤의 지도를 받으며 거문고 풍류를 배우고 연주했다.


거문고 교습을 시작한 지 1년 반 정도 되었을 때 본영산부터 뒤풍류까지 풍류 전바탕을 다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두 스승(조소남, 임석윤)과 함께 매일 조양여관의 풍류방에서 합주를 하며 풍류를 즐겼다. 두 스승이 때로는 가까운 곳에 있던, 조소남의 동생이 경영하던 성주여관의 대구 풍류회 모임에 데리고 가서 다른 풍류인들의 합주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가끔 합주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기도 했다. 김정애의 풍류를 즐기던 일상은 대학을 졸업하던 196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함께 합주했던 풍류인들의 성함 중 기억에 남아있는 분은 제일모직 사장이었던 허순구 뿐이라고 했다.


김정애가 대구를 떠난 후인 1962년 대구에 들러 두 스승에게 인사하러 조양여관을 찾았을 때 조소남만 만나볼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당시 두 사람(조소남과 임석윤)은 결혼했고, 100세 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고 했다. 1969년에 셋째 아이를 업고 다시 조양여관을 찾았을 때는 두 분은 이미 이사 가서 만나볼 수 없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대구 생활을 접고 함께 서울로 가서 생활한 것 같았다는 것.


김정애의 거문고 스승인 호석 임석윤(1907~1976)은 명망이 있는 평택 임씨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풍류를 즐긴 풍류객이다. 거문고와 가곡·가사를 전공했고, 거문고 명인으로 명성이 높았다. 김용남과 김연수에게 거문고 풍류와 가곡을 배웠으며, 말년에는 서울에 살면서 가곡의 명인 이주환의 가곡 반주를 도맡아 하였다. 거문고 명인 한갑득에게 거문고 산조를 배웠다.


임석윤은 광주의 풍류 자리에서 거문고 연주를 도맡아 했다. 당시 광주의 율회(律會)를 주도했던 율객으로 거문고의 임석윤, 대금의 오진석, 가야금의 정남옥 등이 있었다.


김정애는 임석윤에 대해 '전형적인 조선조 선비의 모습을 지닌, 과묵하고 근엄하신 분이며, 훌쩍 큰 키에 귀태가 나는 옥골선풍의 풍류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관 관리인이 대야에 떠다 대령하는 세숫물을 안방에서 받아 실내에서 세수와 양치를 하던 전형적인 옛 양반가의 어른 모습이었고, 자신에게 개인적인 하문을 하거나 함께 담소를 한 적인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1959년쯤 어느 날 조양여관에서 조소남과 함께 풍류를 즐기던 때, 광주에서서 왔다는 어떤 젊은 남자가 임석윤을 가곡 선생으로 청하며 모시고 해인사로 간 기억도 있다고 했다.


◆허순구와 대구 풍류


김정애가 기억하는 허순구(1903~1978)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기업인이자 국악인이었다. 그는 삼성그룹을 창업한 이병철의 누나와 결혼한 사이로, 초등학생이던 처남 이병철을 데리고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허순구는 대를 이은 부농의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드물게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를 수료했다 한다. 그는 1927년 25세 젊은 나이로 일찍부터 경남 진주에서 '문성당'이라는 백화점을 설립하여 기업경영에 나섰다. 이렇게 출발한 그의 기업인생은 1938년에 이병철 회장과 삼성상회를 창립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삼성그룹의 초석이 되었다 한다. 삼성물산, 제일모직, 제일제당 등 삼성그룹 기업의 설립과 경영에 많은 역할을 했다. 삼성그룹의 막대한 자금 지원자로, 또 삼성계열 기업의 주요 경영인으로 참가하며 오늘날과 같은 거대기업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인생 후반부는 대구에서 국악 관련 풍류방을 운영하면서, 국악인들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평생 소장한 국악 악기와 악보 유품을 국립국악원에 기증한 풍류가이자 문화선각자로, 한국의 국악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허순구는 1950년대 이후로는 대구에서 만년을 보내면서 거문고 풍류에 마음을 두었다. 1960년 후반에는 대구 정악회를 주도하며 풍류 활동과 국악인을 돕는 일에 헌신했다. 그는 일찍 거문고 풍류의 아취에 대하여 알고 있었지만, 청장년 시절에는 기업 경영에 헌신하여 풍류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만년에 기업 일선에 은퇴하면서 여유를 찾게 되자 곧 거문고 풍류에 본격적으로 마음을 둔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말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구에서 권학영(權鶴泳)이 회장으로 활동하던 대구 정악회(正樂會)에 참가하여 거문고를 배운 것 같다. 권학영이 회장으로 있던 대구 정악회는 대구 덕산동에 있던 권회장의 순흥약국에 있었다. 회원은 그의 동생 권익영, 약국을 하던 윤창수(允昌洙), 대법관을 지낸 김연수(金然洙), 신문사 주필 서씨 등 많은 인물이 참여했다. 사범으로 방준호, 심창휴, 최창로, 채맹인이 있었다 한다. 그가 거문고에 일가를 이룰 무렵에는 회원들이 노쇠하여 풍류 모임이 해산되고 말았다.


대구 정악회가 해산되자 허순구가 일선에 나서서 동호인들을 다시 모아 풍류 모임을 이끌어 갔는데, 금호강 절벽 위에 있던 그의 별장 금호정에서 풍류회를 열었다고 한다. 195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초까지, 대구에 남아 있던 풍류회원들뿐만 아니라 전라도에서 온 시조의 명인 정경태와 유종구, 단소의 명인 전추산, 판소리 명창 정권진이 참가했다고 한다. 그의 풍류회 활동은 1970년대 초까지 지속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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