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예천육상실내훈련장에서 국가대표 후보 선수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막바지 훈련에 집중하고 있다. 장석원기자 history@yeongnam.com
영하의 한파주의보도 트랙 위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다. 살을 에는 듯한 찬 공기가 훈련장을 감싼 지난 23일 오전, 경북 예천 육상실내훈련장에는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와 함께 하얀 숨결이 번졌다.
출발선 앞에 선 선수들은 고개를 숙여 스타트 자세를 가다듬었고, 트랙 위에서는 선수들의 짧고 날카로운 동작이 반복됐다. 국가대표 후보·청소년·꿈나무 단거리 등 100여 명의 선수들이 예천스타디움과 육상교육훈련센터에서 동계 전지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25일까지 이어지는 합숙훈련이 종반에 접어들었지만 선수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하다.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훈련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파란 트랙 위에서는 허벅지에 저항 밴드를 감은 선수들이 낮은 자세로 첫 발을 떼는 훈련을 이어갔다. 전력 질주 대신, 스타트 반응과 초기 가속 구간을 다듬는 짧은 반복 동작이 중심이다. 몇 미터를 나아가고 멈추는 과정이 수차례 반복됐고, 선수들은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발끝에 시선을 모았다.
지난 23일 전북 익산 이리공고 최진엽 감독이 원반던지기 김나현 선수의 투척 훈련을 지도하고 있다. 장석원기자 history@yeongnam.com
지난 23일 예천 육상실내훈련장 트랙 한편에서 포환 선수들이 투척 연습을 하고 있다. 장석원기자 history@yeongnam.com
트랙 한편에서는 허들을 일정 간격으로 배치한 민첩성 훈련이 진행됐다. 선수들은 보폭을 조절하며 리듬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지도자들은 박자를 놓치지 말라는 손짓으로 훈련을 이끌었다.
다른 공간에서는 원반과 포환이 바닥에 놓인 채 투척 훈련이 이어졌다. 원 안에 선 선수는 몇 차례 회전 동작을 반복하며 균형을 점검했고, 코치의 시선은 발끝과 회전 각도에 고정돼 있었다.
김경출 국가대표 후보 감독(포항 이동고 교사)은 선수들의 발 디딤과 상체 각도를 직접 짚어가며 동작을 조정했다. 김 감독은 "이번 동계훈련은 기초체력과 코어운동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며 "훈련 강도를 잘 조절해야 하지만, 이 시기에는 부상 없이 훈련을 마무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실내훈련장의 한쪽 벽면을 따라 매트 위에 누운 선수들은 폼롤러로 근육을 풀거나 아이싱을 받으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물리치료실에서는 재활 트레이너들이 스트레칭과 치료를 병행하며 선수들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햄스트링 부상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대구체고 우인체 선수는 "예전에는 훈련이 끝나면 외부 병의원을 찾아야 했는데, 지금은 훈련장 안에서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어 훨씬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훈련 후반부, 선수들이 트랙을 따라 단체 러닝에 나섰다. 국가대표 후보 서예림(100m)은 "훈련량은 줄었지만 동작 하나하나에 더 집중하게 된다. 여기에 훈련장과 숙소가 가까워 회복 시간이 충분한 점도 큰 도움이 된다"며 만족해했다.
지난 23일 예천육상실내훈련장 물리치료실에서 선수들이 재활 트레이너로부터 치료를 받고 있다. 장석원기자 history@yeongnam.com
지난 23일 예천 육상실내훈련장에서 부산 연제구청 소속 장대높이뛰기 진민섭 선수(왼쪽)가 동료 후배와 저항 장비를 착용하고 스타트 반응과 초기 가속 동작을 정밀하게 다듬고 있다. 장석원기자 history@yeongnam.com
◆ "찬바람 맞으며 아스팔트 뛰던 것은 옛말"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육상의 겨울은 '인내'의 시간이었다. 전용 실내 훈련장이 전무했던 시절, 선수들은 영하의 혹한 속에서도 두꺼운 패딩을 입고 노천 트랙이나 아스팔트 위를 달렸다.
이정대 대구육상연맹 전무는 "예전엔 겨울만 되면 눈을 치워가며 훈련하거나, 마땅한 장소가 없어 학교 강당을 전전해야 했다"며 "기온이 낮아 근육이 굳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힘을 쓰다 보니 햄스트링이나 발목 부상을 입는 유망주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회상했다.
지도자의 경험과 감(感)에만 의존하던 '재래식 훈련'도 한계가 명확했다. 과학적 분석 장비는커녕 부상 시 즉각적인 처치를 받을 물리치료 시설조차 없어, 선수들은 통증을 참고 뛰다 선수 생명을 단축하기도 했다. '과학', '데이터'는 야구, 축구를 비롯한 대부분의 스포츠 종목에 핵심으로 떠올랐지만 국내 육상에선 남의 나라 얘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예천의 인프라는 이런 '육상 잔혹사'를 끊어냈다. 365일 상온이 유지되는 실내 트랙은 근육 수축을 막아 부상 위험을 획기적으로 낮췄고, 훈련장 바로 옆 물리치료실은 부상의 전조를 잡아내는 '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다.
장대높이뛰기 국가대표 진민섭(부산 연제구청) 선수는 "과거엔 환경적 제약 때문에 겨울 훈련의 흐름이 끊기기 일쑤였지만, 이곳에선 오직 기록 단축에만 집중할 수 있는 '몰입의 환경'이 조성돼 있다"고 말했다.
최진엽 익산 이리공고 감독은 매년 겨울 예천을 찾는다. 최 감독은 "눈이나 비, 바람이 불어도 실내에서 훈련 흐름이 끊기지 않는 점이 가장 큰 강점"이라며 "초창기에는 한 달 계획으로 왔지만, 최근에는 두 달간 훈련할 만큼 환경에 대한 신뢰가 커졌다"고 평가했다.
이 전무는 "하계·동계 훈련 때 전국에서 육상 선수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 놀랐다. 엘리트 선수들이 대관 없이 예약만 하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어 더욱 좋다"고 말했다.
지난 6일 대한육상연맹 국가대표 후보·청소년·꿈나무 단거리 선수단 106명이 예천육상실내훈련장에서 동계합숙 훈련에 앞서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장석원기자 history@yeongnam.com
◆ 인구 5만 예천, 육상인 5만 품다…스포츠 마케팅 효과 '톡톡'
예천군이 육상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명확하다. 인구 5만 명의 소도시가 생존하기 위해 '스포츠 산업'을 선택한 것이다. 예천은 2023년 육상교육훈련센터를 개관하며 훈련·교육·숙박·재활이 한곳에서 이뤄지는 '원스톱 시스템'을 구축했다. 연간 수십 개의 전국 단위 육상대회도 유치하고 있다.
그 결과는 수치로 나타난다. 연간 800여 개 팀, 연인원 5만 명 이상의 육상인이 예천을 찾는다. 이들은 지역 식당과 숙박업소에서 연간 100억 원을 소비하는 것으로 예천군은 추정하고 있다.
최인해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은 "예천 육상 시설은 단순한 지방 체육시설을 넘어 한국 육상의 새로운 심장부"라며 "아시아 육상의 허브로 성장할 충분한 기반을 갖췄다"고 자신했다.
◆시·군들, 국제 규격 앞세워 '제2 예천' 정조준
경북지역 다른 시·군들 역시 스포츠 인프라를 앞세워 '동계 훈련 메카' 자리를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경주시는 사계절 전천후 훈련이 가능한 하드웨어와 풍부한 숙박 인프라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보문관광단지 인근의 알천축구장(5면)과 경주베이스볼파크(3면)는 전국 축구·야구인들 사이에서 이미 '동계 훈련의 최적지'로 통한다. 특히 국내 최초로 건립된 '경주 스마트 에어돔'은 기둥 없는 국내 최대 규모(연면적 1만 729㎡)로, 외부 기상 조건과 관계없이 정규 규격의 축구 경기를 치를 수 있어 예약 문의가 끊이질 않는다.
최태원 대구축구협회장은 "구장이 없어 축구 저변 활성화에 어려움을 겪는 대구 입장에서 경주는 축구인들의 천국"이라면서 "동계훈련지로 유명한 것은 물론, 여름에 유소년 축구 대회가 열려 1만 명 이상의 선수단이 집결하면 도시 자체가 하나의 축구장이 된다"고 귀띔했다.
경주는 겨울철 기온이 상대적으로 따뜻하고 불국사 인근에 대규모 숙박 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매년 수백 개의 팀이 베이스캠프를 차리는 등 연인원 10만 명 이상의 선수단을 유치하고 있다.
유소년 축구의 메카로 불리는 영덕군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영덕은 강구대게축구장(4면)과 영덕창포해맞이축구장(3면) 등 총 10면의 축구 전용 구장을 가동하며 유소년 동계 훈련 시장을 선점했다. 영덕의 강점은 모든 구장이 천연 및 인조 잔디로 관리되어 선수 부상 방지에 탁월하다는 점이다.
매년 1~2월 열리는 '영덕 MBC꿈나무 축구 윈터리그'에는 전국에서 100여 개 팀이 집결하며, 훈련과 대회를 병행하는 시스템을 통해 겨울철 지역 경제에 매년 약 80억 원 이상의 파급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이밖에 김천종합스포츠타운 내 김천실내수영장은 경영, 다이빙, 아티스틱 스위밍 등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국제 규격(50m 10레인)을 갖췄다. 이 덕분에 동계 시즌마다 국가대표 및 상비군 선수단의 상시 훈련지로 활용되며, 매년 전국 단위 수영 대회를 연계해 연인원 5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또 세계 최대 규모의 실내 정구장인 국제정구장을 보유한 문경은 인근 국군체육부대와 교류 훈련이 가능해 선수단들의 단골 전지훈련지로 인기가 높다.
이처럼 경북 지자체들이 '육상(예천)-에어돔(경주)-유소년 축구(영덕)'로 이어지는 종목별 특화 벨트를 형성하면서, 동계 스포츠 마케팅은 인구 감소로 위기를 겪는 지방 도시에 새로운 자생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인터뷰] 최인해 대한육상연맹 부회장
"해외 코치 초빙·재활팀 상주 등 살아 있는 훈련 거점 설계"
최 부회장이 구축한 시스템 속 아시안게임 유망주 '구슬땀'
지난 23일 예천 육상실내훈련장에서 최인해(오른쪽)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이 김경출 국가대표 후보 감독과 올해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을 다짐하며 화이팅 하고 있다. 장석원기자 history@yeongnam.com
예천의 육상실내훈련장과 육상교육훈련센터는 평범한 지방 체육시설이 아니다. 국가대표팀이 사계절 상주하고, 일본 올림픽 코치가 강단에 서며, 전문 재활치료사들(5명)이 선수들의 몸을 관리한다. '누군가의 집요한 노력' 없이는 불가능했을 모습이다. 그 중심에 최인해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예천군청 실업팀 감독 겸임)이 있다.
최 부회장은 중앙 연맹의 전략과 지역 현장의 간격을 좁혀나갔다. 모든 과정에서 '현장의 언어'로 중앙의 전략을 번역해냈다. 최 부회장은 "시설은 하드웨어에 불과하다. 이를 가동할 프로그램을 짜고, 해외 전문가를 섭외하며, 선수단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환경을 만드는 소프트웨어가 필수적이다"며 "연맹의 중장기 전략을 예천이라는 공간 안에서 실행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은 가장 독보적 성과다. 2024 파리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 수석코치였던 야마자키 카즈히코 감독을 초청하고, 한국트레이너협회 전문 재활 인력 5명을 상주시킨 것은 오랜 신뢰가 낳은 결과다. 해외 정상급 지도법과 세밀한 부상 관리 시스템이 결합하면서 예천은 단순한 훈련장을 넘어 '아시아 육상의 거점'으로 거듭났다.
연맹 안팎에선 그를 두고 "시설을 지은 사람이 아니라, 시설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 인물"이라 평가한다. 최 부회장은 "이 정도 운영 체계를 갖춘 곳은 아시아에서도 드물다"면서 "예천이 한국 육상의 명실상부한 메카로 성장할 기반은 이미 완성됐다"고 강조했다.
◆ 권예은·서예림 혹한 속에서 아시안게임을 꿈꾸다
예천 훈련장의 두명의 미녀 스프린터인 권예은과 서예림 선수가 혹한 속에서 아시안게임을 준비하고 있다. 장석원 기자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두 명의 젊은 스프린터가 트랙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이번 동계 합숙훈련의 주인공인 권예은(서울 구로고 2)과 서예림(경북체고 3)이다.
한국 여자 단거리의 미래를 짊어진 두 유망주는 예천 실내훈련장의 강렬한 열기 속에서 기록 단축을 위한 고독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들의 시선은 이미 다음 시즌의 출발선에 맞춰져 있었다.
권예은은 개인 최고기록 12초02를 보유한 유망주다. 목표는 분명하다. 11초대 진입, 그리고 일본 나고야 아시안게임 출전이다. 웨이트 트레이닝과 중거리 달리기를 병행하며 근지구력과 하체 힘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는 "기록에 대한 부담보다, 즐기면서 훈련하자는 마음이 크다"며 "과정에 충실하면 기록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고 말했다.
서예림도 11초97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단계 도약을 준비 중이다. 목표 기록은 11초7대. 그는 이번 동계훈련에서 스타트와 가속 구간의 안정성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서예림은 "긍정적인 마인드로 훈련을 즐기고 싶다"며 "아시안게임이라는 큰 목표를 향해 차분히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장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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