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보현사 외벽에 설치된 동화사 지방학림 만세운동을 주제로 한 스토리보드. 김현목 기자
26일 오전 11시쯤 대구 중구 보현사 본당 옆 무료 급식소는 이른 점심을 해결하려는 어르신들로 붐볐다. 노인들은 길게 줄을 섰고 자원봉사자들이 분주하게 식사 대용품을 나눠줬다.
무료 급식소 앞에 선 어르신들에게 3·1운동 이야기를 꺼내자 "그냥 밥 먹으러 오는 거지"라고 답변을 피했다. 설명을 들은 다른 노인은 "보현사가 그런 곳이었나"라고 되물었다.
분주한 움직임을 뒤로하고 건물 외벽엔 100여 년 전 함성이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3·1운동 만세 시위를 형상화한 대형 스토리보드가 설치돼 있다. 태극기를 들고 두 팔을 치켜든 군중의 모습이 스토리보드 위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아래엔 '동화사 포교당 터(현 보현사) 3·1운동 만세 의거지'라는 설명문이 자리했다.
본당 내부 한쪽 벽면엔 '1919년 대구 3·1 독립만세운동'이라고 적힌 대형 안내문이 걸려 있다. 동화사 지방학림(승가대학) 학인 스님들이 주도한 만세운동 경과와 참여자들 이름이 정리돼 있다. 사진 속 청년 스님과 함께 '건국훈장 애족장', '대통령 표창'을 받은 스님들 이름이 눈길을 끌었다. 한 자원봉사자는 "3·1운동 이야기를 일부러 설명하진 않는다"며 "이런 역사가 있다는 걸 더 많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보현사 본당 내부에 걸려 있는 3·1운동 관련 대형 안내문. 김현목 기자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전국을 뒤덮었다. 3·1운동의 시작이었다. 대구에선 도심 고요한 사찰이 중심에 섰다. 당시 동화사 출장소자 시내 포교 거점이었던 보현사(당시 명칭 보현포교당)였다. 이름보다 '행동'이 앞선 승려들이 박차고 일어났다.
보현사 기록에 따르면 1919년 3월 28일 동화사 심검당에 모인 김문옥·권청학 등 지방학림 소속 승려 10여 명은 3월 30일 대구 장터에서 대규모 만세거사를 벌이기로 뜻을 모았다. 결의 직후 보현포교당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일본 감시를 상대적으로 피할 수 있는 도심 사찰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신도와 상인들 왕래가 잦아 정보 교류에 유리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대구 3.1운동 동화사 법화당(옛 심검당). <영남일보DB>
거사 전날 승려들은 보현사 내부에서 광목을 자르고 직접 태극기를 만들었다. 태극 문양을 그리는 과정은 불자로서 수행이자 결단 의식이었다. 1919년 3월 30일 오후 1시. 승려들은 보현사에서 제작한 태극기를 품에 안고 당시 대구에서 가장 번성하던 덕산정 동문시장(현 염매시장 및 삼성생명 일대)으로 향했다.
장터 한복판에서 태극기가 펼쳐지고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지자 순식간에 군중이 호응했다. 3천여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장터와 인근 거리를 가득 메웠다. 학생·상인·종교인이 함께한 대구 지역 최대 규모 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영천 용화사로 이건된 대구 보현사 대웅전 모습.<보현사 제공>
다른 지역과 달리 승려들이 앞장섰다는 점은 더욱 의미를 더했다. 당시 불교는 조선 억불 정책과 일제의 사찰령으로 위축돼 있었다. 그럼에도 만세 운동을 이끌며 구국의 마음을 보여줬다.
현장에서 체포된 동화사 승려 9명은 같은해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이들은 일제 통치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독립운동은 기쁜 일'이라는 취지의 당당한 진술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식민 권력 앞에서 물러서지 않은 것이다. 이들 모습은 불교적 수행 정신과 민족의식이 결합된 결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동화사 지방학림은 약 한 달간 휴교 조치를 당했고 사찰도 일제의 감시와 압박을 받았다.
김문옥 스님(촬영당시 34세) <영남일보DB>
보현사의 3·1운동 참여는 불교계가 단순히 정신적 지지에 머물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독립운동에 나섰음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로 꼽힌다. 또한 도심 사찰이 지역 항일운동의 조직·준비·출발 공간이 됐다는 점에서 공간사적 의미가 크다. 특정 영웅 한 사람의 서사가 아닌 집단적 결의와 연대가 만들어낸 역사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보현사는 3·1운동 역사문화체험관 건립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호국 역사의 성지지만 대구시민들조차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 보현사 측 판단이다. 단순한 기념 공간을 넘어, 청소년과 시민이 역사 현장을 배우고 체험하는 교육의 장으로 조성하겠다는 의미다.
보현사 법당엔 1919년 발간된 '조선독립신문' 등 독립 관련 자료가 발견된 사실이 재조명 됐다. 불상 아래에 숨겨져 있던 신문은 일제강점기 비밀리에 전해진 독립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료로 평가된다. 서울 진관사에서 태극기가 발견된 사례와 함께 불교계의 항일운동을 보여주는 대표적 장면으로 꼽힌다.
체험관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체계적으로 정리·전시하는 공간으로 기획되고 있다. 3·1운동 준비 과정 재현, 독립신문과 재판 기록 전시, 후손 증언 및 자료 아카이브 등이 담길 것으로 것으로 보인다. 단순 전시를 넘어 '살아있는 역사교육 현장'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목표다. 체험관 건립은 현재 구상 단계로, 부지 확보와 재원 마련, 지자체 및 정치권 협의가 과제로 남아 있다.
보현사 지주 지우 스님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선열들의 정신을 기리고 오늘의 세대가 국가 공동체의 의미를 되새기는 공간이 필요하다"며 "체험관 건립을 통해 미래 세대가 3·1운동의 가치와 비폭력 독립정신을 배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또 "확정된 사안은 아니지만, 독립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 교육 공간의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김현목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