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국악 연주단체 우리음악집단 소옥. 우리음악의 아름다움을 알린다. <본인 제공>
학창시절 전통음악(국악)을 들으면서 '지루하다'거나 '따분하다'는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다. 대체로 아주 느리게 흐르는 음악이었기도 하고, 그렇다고 빠르다고 하는 장단감 있는 음악 또한 드럼이 주는 감흥에 비할 것은 못된다고 여겼던 듯하다.
돌이켜 보면 국악은 일상과 꽤 거리가 먼 음악이었다. 주변 그 누구의 플레이리스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오죽하면 MP3 속 첫 국악의 기억이 드라마 '대장금'의 주제가 '오나라'였을까. 그것마저도 전통음악이라기보다, 전통을 바탕으로 한 크로스오버 음악(Crossover, 장르를 결합하거나,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개인의 작곡 방향에서 국악을 하나의 음악적 재료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전통음악에 대한 인식은 달라졌다. 느린 흐름 속에는 중요한 미학이 담겨 있었고, 장단이라는 독자적인 리듬 체계는 시간을 담는 고유한 틀이었다. 이 음악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무엇으로 국악이라 불리는지를 주목했던 순간, 감상의 기준이 바뀌었다. 전통음악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질서를 가진 음악이다. 우리음악집단 소옥과 대구시립국악단에서의 작업을 통해 이 질서를 직접 마주하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이 음악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2023년 열린 종묘제례악 행사.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올랐다. <국가유산청 제공>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가. 먼저 서양음악의 박자는 심장 박동을 기준으로 한 규칙적 단위 위에 형성된다. '하나-둘'로 나뉘는 박은 시간을 균등하게 분할하며 나아간다. 주제가 나타나고, 전개되고, 고조되며, 어느 순간 결론을 향해 수렴한다. 우리는 이 흐름을 따라가며 음악을 이해하고, 마지막에 긴장이 해소되는 지점에서 감정의 완결을 느낀다. 음악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되는 감정의 곡선도 대개 이러한 구조 안에서 형성된다.
반면 국악의 장단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을 기준으로 작동한다. 한 박은 잘게 쪼개지기보다 하나의 덩어리로 유지된다. 장단은 단순한 리듬 패턴이 아니라, 연주자와 청자가 함께 공유하는 시간의 틀이다. 이 틀 안에서 소리는 반복되면서도 조금씩 달라지고, 그 미세한 차이가 감상의 중심이 된다.
서양음악이 끝을 향해 나아가는 직선적 구조라면, 국악은 순환하며 머무는 구조에 가깝다. 그래서 국악을 듣는 일은 다음에 올 변화를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지금 머물고 있는 소리의 결을 따라가는 일이다. 변화는 극적으로 드러나기보다,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 조금씩 축적된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어디로 가는가'보다 '어떻게 머무는가'가 중요해진다. 이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듣는다면, 국악은 자연스럽게 느리고 단조로운 음악으로 오해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느림은 단지 빠르기의 표현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운행하는 시간이다. 표면적인 속도와 달리, 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다만 이러한 차이는 우리가 이미 익숙해진 음악적 기준 속에서는 쉽게 감지되지 않는다.
오늘날 일상에서 접하는 음악의 대부분은 서양음악의 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대중음악 역시 이와 같은 구조를 공유하며 일정한 박과 분명한 비트, 그리고 명확한 형식을 따른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형성된 음악 감각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기준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음악 교육 또한 오선보와 박자, 화성의 기능과 같은 서양음악적 문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국악이 등장하더라도, 그것을 몸의 감각으로 익히기보다 지식으로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제17회 아르코한국창작음악제 국악 부문 '파묵' 공연. <본인 제공>
국악이 낯설게 들리는 이유는 음악 자체의 어려움에 있지 않다. 국악을 서양음악의 반대항에 놓고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감상에서도 그 차이가 곧 결핍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느리며, 반복적이고, 덜 극적인 음악이라는 설명은 이미 다른 기준 위에서 이루어진 판단이다. 국악은 '무엇이 아닌 것'으로 정의되는 음악이 아니다. 고유한 방식으로 성립하는 음악이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무의식적으로 묻는다. 이 음악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언제 변하는가, 어디서 감정이 고조되는가. 이는 직접적인 질문이라기보다, 우리가 음악에 감동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 자체가 이미 특정한 음악 구조를 전제로 한다. 국악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한 음악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질문부터 달라져야 한다. 그 질문의 방식은, 우리가 음악을 대면하고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규정하고 있다.
느리고, 반복적인 흐름에 지루함을 느끼는 것 자체는 충분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다만 그러한 반응이 하나의 기준으로 굳어져 다른 음악의 세계를 경험할 가능성까지 제한한다면,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질문을 바꾼다는 것은 어떤 음악을 그만의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며, 그 음악이 왜 그런 형태를 갖게 되었는지, 그 존재의 이유와 형성의 역사까지 함께 따라가는 일에 가깝다.
지난해 대구어린이세상 꿈누리관 3층에서 열린 대구시립국악단의 찾아가는 공연 '사랑방 음악회'. <대구어린이세상 제공>
이제 다시 처음의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빠르다고 하는 장단 역시 드럼이 주는 감흥에 비할 것이 못 되었다." 이 문장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서로 다른 음악을 하나의 기준 위에 놓고, 익숙한 감각으로 비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필자의 과거처럼 말이다.
국악과의 거리감은 개인의 감상 습관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국악은 애초에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소비되는 음악이 아니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만 접하게 되는 음악이었고, 많은 경우 그것은 학교 음악 시간이나 방과 후 프로그램 같은 제한된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그마저도 최근 교육 현장에서 국악 인프라 부족과 교사의 지도 부담이 문제 제기되며, 국악 교육 축소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전통음악을 일상과 교육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접하고, 이를 몸의 감각으로 익히는 기회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에서, 전통음악의 낯섦은 일정 부분 구조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낯섦은 한편으로 다른 가능성을 만들기도 한다.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작업들이 동시대 음악 안에서 주목받고 있는 흐름 역시 이와 맞닿아 있다. 무가(巫歌, 무속의식에서 무속인이 구연하는 사설이나 노래)를 기반으로 한 대중음악, 재즈와 전통음악을 넘나드는 작업, 그리고 전통 악기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음향적 시도에 이르기까지, 전통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언어로 확장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음악이 종종 '새롭다' '독특하다'는 말로 소개된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낯선 상태가 새로운 감각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익숙하지 않기에 더욱 관심이 생기는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다.
다만 그 낯섦이 '들어본 적 없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음악의 감각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음악적 경험과 교육, 그리고 문화 속에서 형성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악을 새롭게 만드는 일만이 아니라,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감각을 다시 일깨워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음악의 감각, 이를테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떤 문화적 DNA를 다시 심고 회복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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