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인사이드] ‘동계체전 4관왕’ 최예린 선수…대프리카’에서 열여덟 소녀는 벽을 잡고 설원을 보았다

  • 이효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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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5-26 18:14  |  발행일 2026-05-26
‘동계체전 4관왕’ 스키 요정 최예린이 말하는 내리막의 미학
“실수를 지우려 애쓰기보다, 해야 할 전략으로 머릿속 채우죠”
방구석 ‘벽 훈련’으로 이겨낸 척박함… 이제 국가대표 마크 향해 질주
한국체대 새내기가 된 알파인 스키 4관왕의 최예린 선수가 인터뷰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1인자의 비결에 대해 다음 순간 내가 해야 할 일만 생각한다. 불안을 잠재우는 방법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효설기자

한국체대 새내기가 된 '알파인 스키 4관왕'의 최예린 선수가 인터뷰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1인자의 비결에 대해 "다음 순간 내가 해야 할 일만 생각한다. 불안을 잠재우는 방법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효설기자

'대프리카'와 '알파인 스키'.


갈색 생머리에 경쾌한 크롭 셔츠, 서툴지만 공들인 화장까지. 영락없는 대학 새내기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카페 테이블 너머로 마주 본 최예린(18)의 눈빛에는 영하 10도의 칼바람을 뚫고 시속 100km로 질주한 승부사의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 대구의 아스팔트 열기 속에서 설원을 상상하며 스키를 타던 소녀는, 이제 대구 출신 최초의 '알파인 스키 4관왕'이라는 타이틀을 들고 우리 앞에 섰다.


지난 2월 열린 제107회 전국동계체육대회에서 최예린은 '알파인 스키 4관왕'을 달성했다. '눈 구경 하기 힘든'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라 '설원(雪原)의 여왕'이 된 것이다. 대프리카와 스키.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이 양 극단의 조합을 어떻게 완성시켰을까.


알파인 스키는 뒤꿈치가 고정된 바인딩을 장착한 스키를 타고 가파른 설면을 내려오며 기문(Gate·선수가 통과해야 하는 폴대)을 지그재그로 통과하는 종목이다. 평균 시속 100km를 넘나드는 속도감의 '슈퍼대회전', 정교한 발재간으로 좁은 기문 사이를 뱀처럼 파고드는 '회전', 그리고 이 둘의 중간 격인 '대회전'으로 나뉜다. 최예린은 이 모든 종목과 점수를 합산한 '복합'까지 석권하며 '올라운더'의 면모를 과시했다.


대회 후 약 3개월, 해외 전지훈련에서 돌아온 그를 이달 초순, 시지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어떻게 지냈나요.


"판에 박힌 생활이죠. 오전 6시 새벽운동, 9시부터 교양수업, 오후엔 체력운동을 하고요. 기숙사 통금이 밤 9시여서 운동 말고 다른 건 못해요.(웃음)"


▷한국체대 체육학과에 입학했죠. 서울 오륜동에 캠퍼스가 있으니 스키는 매일 못타겠네요.


"네. 학교에선 체력운동만 해요. 스키 타려면 평창이나 용평 리조트 가야죠. 시지고 다닐 때도 아빠 차타고 3시간30분 걸리는 용평을 왔다갔다하면서 선수생활해서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여기선 훨씬 가까우니까 좋아요."


지난 동계체전에서 기문을 통과하며 설원을 질주하고 있는 최예린. 그녀에게도 슬럼프는 찾아오지만 스키가 타기 싫을 때는 없었다고 고백했다. <최예린 선수 제공>

지난 동계체전에서 기문을 통과하며 설원을 질주하고 있는 최예린. 그녀에게도 슬럼프는 찾아오지만 스키가 타기 싫을 때는 없었다고 고백했다. <최예린 선수 제공>

최예린은 만 5세에 스키 부츠를 신었다. 스키장에 놀러갔다가 난코스를 매끄럽게 내려오는 딸을 보고 아버지가 "예린아, 스키 타자"며 이끌었다. 초등 1학년 때 스키 레이싱(알파인)에 정식으로 입문했고, 이후 매년 12월 초부터 3월 초까지 스키장에서 훈련했다. 여름 방학 기간엔 프랑스, 네덜란드, 호주 등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동계체전 수상도 화려하다. 2026년 4관왕, 2025년 2관왕, 2020년 4관왕을 해냈다. 초등 때부터 각종 대회에서 1위를 휩쓸었다. '전설' '1인자' '천재'란 수식어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더워 죽겠다는 대구에서 스키라, 훈련하기 엄청 힘들었을 듯 합니다.


"대구엔 훈련 여건이 갖춰져 있지 않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대구선 학교 다니고, 방학 때 강원도 스키장서 몇달 씩 합숙하며 스키 탔어요. 강원도 선수들이 많지만, 서울, 부산 등 전국에서 모이니까. 뭐, 그게 힘들진 않았고요. 유럽, 일본, 호주가 훈련 환경이 좋긴 한데, 우리나라 강원도 시설도 괜찮습니다."


지난 2020년 대구 사월초등 6학년이었던 최예린 선수 모습. 당시 제101회 전국동계체육대회 스키 알파인 여초부 회전에 출전해 금메달을 획득했다.<영남일보 DB>

지난 2020년 대구 사월초등 6학년이었던 최예린 선수 모습. 당시 제101회 전국동계체육대회 스키 알파인 여초부 회전에 출전해 금메달을 획득했다.<영남일보 DB>

▷대구에 머무는 시간엔 어떤 훈련을 하죠.


"체력훈련이 다에요. 집 근처에서 크로스핏(여러 종류의 운동을 섞어 단기간·고강도로 하는 운동방법)을 3년 정도 다녔어요. 이게 짧고 굵게 하는 운동이라서 선수 운동으로 부족하지 않더라고요. 아, 집에서 하는 저만의 훈련이 있긴 해요. 벽을 잡고 몸을 기울여 스키 탈 때처럼 엣지를 세우고, 무릎을 굽히고…. 벽을 밀면서 '여기가 기문이다, 저기가 급경사다' 상상하는 거죠."


▷노력이 대단하네요. 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웃을 것 같은데.


"(웃음) 맞아요. 미친 아이처럼 보였겠지만, 제 머릿속에선 이미 수만 번 용평의 슬로프를 내려오고 있었거든요. 그 '벽 훈련' 때문에 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대구 시지고 시절, 스키를 한 번도 안 타본 친구들도 적잖았다. 그들은 최예린을 향해 가끔 "스키 선수라고? 대구서 스키를 탄다고?"라며 신기해했다. '빙상'을 모르는 여고생은 없지만, 반대로 대표적 '설상' 종목인 알파인 스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최예린은 현재 알파인 스키 종목 여자부 국가대표 상비군 1번이다. 내년에 국가대표 마크를 달 자신이 있다고도 했다. 올해 여자 국대는 고작 3명 뿐. 그중 단 한 명만 올림픽 출전권을 얻는다. 남자부도 국대 7명 중 1~2명이 올림픽에 나간다.


▷동계체전에서 4관왕을 했는데, 국대가 아니라니 좀 의외입니다.


"빙상보다 설상이 국대로 뽑히기 힘들어요. 기본적으로 선수 인원이 적은데다 해외 선수들보다 기량도 떨어지고요."


▷예린 선수가 보기에 우리 알파인 스키가 세계의 벽을 넘으려면 딱 필요한 '한 끗'은 뭔가요?


"어린 유망주와 베테랑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어요? 지금 당장은 선배들이 빠를지 몰라도 커가는 후배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본은 연령별로 국대를 뽑아 어린 선수들이 자기들끼리 치열하게 싸우며 성장할 수 있는 사다리를 놔주거든요. 우린 성적만으로 선발하니까 밑에서 위만 쳐다보다 끝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국대와 상비군 선수간 나이 차도 크고 실력 차도 커요."


예린 선수의 말은 후배들을 위한 통로를 열어달라는 간절한 호소였다.


대한민국의 알파인 스키 국가대표 규모는 남녀 합쳐 10명 안팎. 일본의 경우 연령별 수십 명에 달한다. 일본의 등록 선수는 3만~4만 명으로 한국의 100배. 수도권과 강원 중심의 국내 스키장 인프라는 10여 곳에 불과하지만, 일본은 400곳이 넘는다.


운동하기 힘들 땐 어떻게 극복할까. 그는 "솔직히 타기 싫을 때도 있지만 막상 설판 위에 올라가면 스피드가 재밌어서 잊어버린다"면서 "슬럼프 극복 방법, 아직 그런 것도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기록이 안나올 땐 "오늘은 좀 안타깝네"하며 잊어버리고 다음을 기약하는 편이란다. 중학교 때부터 써온 '스키일지'는 보물 1호다. 잘 탔을 때의 느낌을 기록해 슬로프에 서서 복기한다고.


▷지난 2월 밀라노 동계올림픽에서 최가온, 유승은 같은 10대 선수들이 반란을 일으켰죠. 느낌이 어땠나요.


"와,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 잘 하지? 감탄하면서 봤어요."


내리막의 공포. 그건 어떤 것일까. '한국의 겨울왕국'이라 불리는 용평 리조트의 최고 정상 높이는 해발 1천458m. 최예린은 "선수라면 슬로프의 높이, 경사도가 익숙해 공포감은 없어요. 다만, 눈의 상태가 공포가 발생하는 지점이죠. 한번 엣지를 못 걸면 미끄러질 수 있고, 앞 선수의 궤적을 잘 보고 따라가야 하거든요."


▷알파인 스키로 들어선지 어언 13년차다. 자신만의 안목, 철학이 자리잡았을 것 같은데.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실수 안 해야지' 하고 내려오면 꼭 실수를 해요. 뇌가 '실수'라는 단어에만 꽂히거든요. 그런데 '저 기문을 어떻게 통과해야지', '여기선 몸을 이렇게 던져야지' 하고 제가 해야 할 일만 생각하면 신기하게 공포가 사라져요. 하지 말아야 할 걸 지우는 게 아니라, 해야 할 걸 채우는 거죠."


-앞으로 채워나가야 할 부분이 있다면.


"경사에서 바닥으로 떨어질 때 리듬 변화가 생기는 데 적응이 잘 안돼요. 코치 선생님이 생각을 바꿔야 몸이 따라 움직인다고 하시는데…. 코스가 바뀔 때 리듬을 탁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코스가 달라졌는데 같은 리듬으로 타면 안되죠."


실수를 지우려 하기 보다 다음 기문을 통과할 전략으로 머릿 속을 채운다는 18세 올라운더. 그녀의 레이스는 이제 막 첫 번째 기문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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