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칼럼]정재걸의 오래된 미래교육…이법계와 사법계

  • 김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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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6-11 17:41  |  발행일 2026-06-12
이법계와 사법계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나이 70이 다 되도록 나는 깨달음의 체험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텔레비전에서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것을 보면 커다란 분노를 느낀다. 또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우기는 사람에 대해서도 거센 분노가 일어난다. 이 경우 깨달은 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불교 화엄 사상에서는 세계를 보는 관점을 네 가지 층위로 설명한다. 사법계(事法界), 이법계(理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가 그것이다. 여기서 사(事)는 개별적 현상이고, 이(理)는 모든 존재를 관통하는 궁극의 원리다. 전쟁으로 선량한 시민이 학살되는 것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사법계의 차원에서는 매우 자연스럽다. 사법계에서는 모든 것을 분리된 개체로 보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가해자, 옳음과 그름, 나와 너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민간인이 폭격으로 죽는다면 그것은 명백한 비극이다. 또 인간의 독선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다.


사법계의 눈으로 보면 분노는 윤리적 감수성의 표현이다. 사법계에만 머물면 세계는 끝없는 대립의 장이다. '나는 정의고 저들은 악이다'라는 구조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법계에서는 구별된 개별 현상보다 그것들을 관통하는 근본 성품을 본다. 그 자리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모두가 인연과 무명 속에서 잠시 그렇게 드러난 존재이다. 이법계에서는 '왜 저런 폭력이 생기는가?'를 존재론적으로 본다. 탐욕, 공포, 집착, 집단적 기억, 자기 동일시가 서로 얽혀 폭력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본다.


이법계를 본다고 해서 사법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공하다.' 혹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본래 없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현실의 고통에 무감각해질 수 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이사무애법계다. 이사무애법계에서는 궁극적 진리(理)와 현실적 현상(事)이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가 공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눈앞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깨달은 자는 '본질적으로는 모두가 공한 존재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이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고 여긴다.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나와 타자의 경계가 없다.


이사무애법계에서는 타인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처럼 느껴진다. 깨달은 자는 냉담함이 아니라 더 깊은 자비로 세계를 바라본다. 사법계에서 '왜 저들은 저렇게 악한가?'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세계를 본다면, 이법계에서는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악하게 만드는가?'를 함께 본다. 사법계의 눈은 행위를 중심으로 보고, 이법계는 존재의 조건 전체를 본다. 일반인은 분노 속으로 휩쓸려가지만, 깨달은 자는 분노를 포함한 전체 마음의 움직임을 본다. 이때 분노는 사법계의 진실이지만, 깨달음은 그것을 이법계의 통찰로 꿰뚫되 다시 현실 속 자비의 행동으로 돌아오게 한다.


수행의 핵심은 사법계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법계 속에서 이법계를 보고, 이법계를 품은 채 사법계로 돌아오는 일이다. 깨달은 사람은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고통을 더 예민하게 느낀다. 깨달은 사람은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 또렷하게 알아차리고 그것을 억압하지도 않고 그것에 휘둘리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분노가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누가 분노하고 있는가?'이다. 분노는 자아를 강화한다. 분노는 자신을 정의롭다고 느끼게 만들고, 동시에 타인을 악으로 고정한다. 세상의 많은 폭력은 정의감에서 출발한다. 깨달음은 전쟁의 참혹함을 외면하지 않지만 동시에 인간이 왜 그렇게 되는지도 함께 본다. 폭력의 구조 자체를 본다.


누군가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우길 때, '저 사람은 독선적이야'라고 반응하지만, 깨달은 자는 그 안의 두려움을 바라본다. 자기 확신에 집착하는 사람은 대개 그 내면이 불안하다. 자신의 세계관이 무너지면 자기 존재도 무너진다고 느끼기에 더 공격적으로 자기주장에 집착한다. 독선은 종종 무지 이전에 두려움이다. 이런 두려움을 꿰뚫어 본다고 해서 깨달은 자가 침묵하거나 무기력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필요하면 매우 단호하게 행동한다. 전쟁을 반대할 수도 있고, 억압받는 자를 보호할 수도 있으며, 거짓을 비판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의 바탕은 증오가 아니라 자비다. 자비란 감상적인 동정이 아니라, '모두가 무명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통찰이다.


선불교에서는 '분별은 하되 차별하지 말라'고 말한다.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명히 보되, 그 분별 위에 증오의 자아를 세우지 말라는 뜻이다. 분노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분노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깨달음은 감정이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감정 속에서 '보는 자'가 깨어나는 일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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