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캐스팅으로 주목받은 EMK뮤지컬컴퍼니 제작 대형 뮤지컬 '베토벤'이 오는 8월11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된다. 지난 18일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 기준 공연예매 순위에서 장르 통합 1위를 기록한 이 작품은 'ONLY IN SEOUL' 타이틀을 걸고 서울에서만 공연된다.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1 대구에 거주하는 20대 직장인 정모씨는 매달 최소 한 번은 서울행 기차에 오른다. 오직 서울에서만 열리는 뮤지컬을 관람하기 위해서다. 최근에도 목 빠지게 기다리던 작품이 서울에서만 공연된다는 소식을 듣고 한숨을 쉬며 표를 예매했다. 최대 19만원에 육박하는 티켓값에 KTX 왕복 교통비, 숙박비, MD 구매 비용 등 부대 비용이 추가로 얹어진다. 그렇다 보니 비용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주말동안 4편의 공연을 전투적으로 몰아보는 것이 부지기수다. 보통 공연 전에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운다는 정씨는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고생이 눈 녹듯 사라지지만, 텅 빈 통장 잔고를 보면 씁쓸하다"고 털어놨다.
#2 반면 1년 전 서울에 정착한 친구 김모씨의 일상은 다르다. 취준생인 김씨는 대구에 살 때도 일 년에 한두 번 공연을 보기 위해 상경하곤 했지만 이제는 문화를 일상처럼 누리는 '골수 관객'이 됐다. 저녁 여가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데다 당일 마감 할인, 지역민 할인 등 다양한 혜택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문화적 접근성이 높아지니 삶의 스펙트럼이 넓어진 기분이다. 그동안은 큰 관심이 없던 미술관과 박물관 전시에도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며 "이 인프라를 포기할 수 없어 앞으로 직장도 수도권에서만 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지도가 서울이라는 거대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문화 지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쪽에서는 퇴근길에 가벼운 마음으로 세계적 수준의 무대와 거장들의 전시를 골라 즐기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문화 향유를 위해 주말을 반납하고 '서울 원정 관람'을 감행해야 하는 구조적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어디에 사느냐'가 개인의 문화적 식견과 라이프스타일을 규정하는 시대이다 보니, 지방 청년들의 문화적 소외감과 빈곤감이 증폭되고 있다. 일자리를 넘어 문화·여가 인프라 면에서 수도권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사이, 비수도권의 문화 정주 여건은 더욱 취약해지고 있다. 이는 결국 지방 소멸을 가속화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수도권에 집중된 문화 인프라·소비시장
화려한 캐스팅으로 주목 받은 EMK뮤지컬컴퍼니 제작 대형 뮤지컬 '베토벤'이 오는 8월11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된다. 지난 18일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 기준 공연예매 순위에서 장르 통합 1위를 기록한 작품은 'ONLY IN SEOUL' 타이틀을 걸고 서울에서만 공연된다.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문화 인프라와 소비의 '수도권 독식' 현상은 수치로 명확히 드러난다.
예술경영지원센터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의 공연 티켓 매출액에서 수도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82.69%였던 반면, 대구를 포함한 비수도권의 비중은 17.31%에 불과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5년 공연예술조사(2024년 기준)'를 살펴보면 전국의 공연단체 총 4천349곳 중 수도권(2천695곳) 비중은 무려 62%에 육박한다. 특히 시장 트렌드를 주도하는 민간기획사의 경우 전체의 79.5%(546곳 중 434곳)가 수도권에 밀집해 있어 상업 공연 인프라의 격차가 두드러진다.
이러한 격차는 공연의 형태에서 비롯된다. 서울 대학로와 잠실, 한남동 일대에서는 상시 공연이 즐비하지만, 지방은 아무리 흥행한 대작이라도 길어야 한 달, 짧으면 사흘 정도 머무는 '투어 공연' 형식에 의존한다. 세계적인 내한 공연 역시 서울에서 수개월간 장기 흥행을 이어간 뒤 철수하기 일쑤다. 지방 청년들에게 문화는 언제든 누릴 수 있는 '일상재'가 아니라, 특정 시즌에만 허락되는 '한정판'인 셈이다.
물론 민간 기획사 입장에서도 현실적인 고충이 존재한다. 지난 1월 대구에서 열린 뮤지컬 '위키드' 오리지널 공연은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 기준 올해 1분기 뮤지컬 공연시장 티켓판매액 통계에서 전체 10위를 차지했지만, 현장에서는 공연 횟수를 줄이고도 흥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최원준 파워포엠 대표는 "수십억 원이 드는 제작비를 회수하려면 수개월간 장기 공연을 해야 하는데, 지방은 시장 규모가 작아 비즈니스 면에서 한계가 있다"며 "최근 지역의 뮤지컬 시장은 정체되거나 악화됐다고 느낀다. 예전이라면 과감히 시도했을 작품도 한 번 더 고민하게 된다"고 전했다.
◆시각예술도...숨 막히는 수도권의 '문화 독식'
시각예술(미술·전시) 분야에서도 수도권 편중은 여실하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5 미술시장조사(2024년도 기준)'에 따르면 국내 화랑(갤러리) 10곳 중 6곳(58.3%)이 서울에 모여 있으며 국내 화랑 매출액의 무려 87.77%가 서울 한 곳에서 발생하는 등 미술 시장의 자본과 인프라가 서울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해외 거장들의 대형 기획 전시 대부분도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정부의 세금이 투입되는 국립 공연시설마저 이러한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오히려 심화시킨다.
2024년 기준 공연단체 지역 및 특성별 단체 수. <자료=문화체육관광부·예술경영지원센터 2025년 공연예술조사보고서>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5년 공연예술조사'에 따르면 전국에 단 14곳뿐인 국립 공연단체 중 무려 11곳(78.6%)이 서울에 몰려 있다. 나머지 국립 공연단체는 부산에 1곳, 전북에 1곳, 전남에 1곳으로 단 3곳뿐이며, 대구를 비롯한 13개 지방자치단체는 국립 공연단체가 단 한 곳도 없다.
◆일자리 이어 '문화' 때문에 "지방 떠나겠다"는 청년들
내달 5일, 10~12일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피아노의 숲' 초연을 선보인다. 작품은 대구문예회관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이 공동으로 기획·추진하고, 대구시립극단과 뮤지컬 제작사 해븐프로덕션이 협업한 대구발 창작 뮤지컬이다. 사진은 뮤지컬 '피아노의 숲' 연습 모습. <대구문예회관 제공>
이 같은 인프라 불균형은 '문화 빈곤감'을 넘어 지방 소멸을 가속화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구정책연구원의 '대구시 청년 삶 실태 및 정책 수요 조사'(2025년). <자료=대구정책연구원>
대구시가 대구정책연구원에 의뢰해 작성된 '제3차 대구시 청년정책 기본계획'(2025)에 담긴 '대구시 청년 삶 실태 및 정책 수요 조사' 결과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대구 청년의 무려 63.1%가 향후 타 지역으로 이주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이주를 희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더 나은 일자리'(45.8%)였다. 이어 '더 나은 문화 혜택'이 15.8%를 차지하며 2위로 나타났다. 이는 청년들이 일자리만 쫓아 타 지역으로 이주를 희망하는 것을 넘어, 삶의 질을 결정짓는 '문화적 인프라'를 주거지 선택의 핵심 기준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자리 유치만큼이나 지역 내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청년 인구 유출을 막는 시급한 과제라는 방증이다.
◆국립 시설 유치 등 실질적 '문화 분권' 절실
지난 1월 대구에서 열린 뮤지컬 '위키드' 오리지널 공연은 공연예술통합전산망 기준 올해 1분기 뮤지컬 공연시장 티켓판매액 통계에서 전체 10위를 차지했다. 뮤지컬 '위키드' 내한 공연 장면. <에스앤코 제공>
지역 문화계 관계자들은 주소지가 규정하는 '문화 성벽'이 더 단단해지기 전에, 겉치레가 아닌 실질적인 문화 분권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박경숙 대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국립시설과 같은 앵커 시설이 지역에 들어온다면 문화접근성 향상과 문화서비스의 질 향상 뿐만 아니라 지역 문화생태계 전반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면서 "다만 이 시설이 지역 생태계와 유기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모델이 될 때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역 특화형 국립·공공 시스템' 도입과 같은 문화 분권을 대안으로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안희철 대구연극협회장은 "유럽 등 해외 문화 선진국들은 인구 100만이 넘는 거점 도시마다 국립극단이 하나씩 있다"면서 "부지는 지역 대학이나 기업 등이 제공하고, 건축은 국가가, 운영비는 지자체가 부담하는 '지역 특화형 국립 시스템'이나 지역의 우수한 기관이나 단체를 기간제로 국립으로 지정해 지원하는 보다 유연한 방식을 검토해 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박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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