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빅5' 병원의 암 진료 인원이 5년 새 18% 이상 급증한 가운데, 대구를 포함한 비수도권 환자들의 상경 진료가 끊이지 않고 있다.
초여름 기운이 완연했던 지난 13일 오전 7시, 동대구역 플랫폼에는 얇은 바람막이 자켓을 걸친 '상경 환자'들로 북적였다. 이들 손에는 하나같이 여행용 가방 대신 대학병원 로고가 선명한 커다란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대구 달성군에 사는 암 환자 김윤식(67)씨는 "낮 기온이 30℃까지 치솟는다는데, 서울 대형 병원 진료를 받으려면 해가 뜨기도 전에 서둘러야 한다"며 "왕복 8시간을 길 위에서 허비할 때마다 지방에 사는 것이 마치 죄처럼 느껴진다"고 토로했다.
대한민국에서 '어디에 사느냐'는 이제 단순한 주거의 문제를 넘어서 생존의 질과 직결되는 상황이 되고 있다. 특히 의료 영역에서의 공간적 불평등은 생사(生死)를 가르는 결정적 잣대로 작용하고 있다. 영남일보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최근 의료이용 데이터를 전수 분석한 결과, 지방민의 '의료 난민화' 현상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 고착화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SRT 종착역인 서울 수서역 앞 전경. 역 앞에는 이른바 빅5병원이 상경 의료 진료를 오는 지방환자를 병원까지 이송하는 셔틀버스 정류장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최수경 기자
◆'빅5' 환자 4명 중 1명은 원정객
동대구역을 출발한 환자들이 마주하는 서울의 풍경은 한층 더 처절하다. 오전 10시, SRT 수서역 3번 출구 앞 상급종합병원 무료 셔틀버스 정류장에는 50m가 넘는 긴 줄이 늘어섰다. 삼성서울병원·강남세브란스병원·서울아산병원 등의 셔틀버스가 5~10분 간격으로 도착했다. 하지만 밀려드는 인파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였다. 발 디딜 틈 없는 버스 정류장에서 환자들은 초조하게 스마트폰 앱을 확인하며 서울지역 병원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 같은 '서울 의료 블랙홀' 현상은 통계상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2024년 서울 5대 상급종합병원(서울대·세브란스·서울아산·삼성서울·서울성모)을 찾은 전체 환자 239만2천715명 중 비수도권 거주자는 65만4천303명(27.3%)에 달했다. 2020년(59만3천556명)과 비교하면 불과 4년 새 10.2%가 급증했다.
대구 대학병원 응금실에 주차된 구급차 앞으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영남일보 DB
◆원정 진료 '비수도권 1위' 경북
특히 대구경북(TK) 지역의 의료 자산 유출은 전국 최고 수준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거주지별 암 치료 진료 현황'을 분석해보면 암 진료를 위해 서울 '빅5' 병원을 찾은 경북지역 환자는 지난 5년간(2018~2022년) 12만4천469명(누적치)으로 집계됐다. 이는 서울과 경기도를 제외한 전국 15개 시·도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은 수치다. 경북이 사실상 대한민국 '상경 원정 진료'의 최대 이용지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셈이다. 경북지역의 상경 암 환자는 2018년 2만3천320명에서 2022년 2만6천769명으로 14.8% 늘었다. 대구도 이용자 상승곡선이 가파르다. 같은 기간 1만874명에서 1만2천951명으로 19.1%나 늘었다.
경제적 차별은 더 혹독한 수준이다. 2024년 기준 '빅5 병원'을 이용한 비수도권 환자의 1인당 평균 진료비는 약 305만원으로파악됐다. 수도권 거주 환자(약 214만원)보다 약 90만원을 더 지불한 것이다. 지역 의료 인프라가 감당하지 못하는 '초중증' 상태가 되어서야 서울행 열차에 오르기 때문에 진료비 단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KTX 운임, 보호자 체류비, 병원 인근 '환자방' 숙박비까지 감안하면 지방 환자가 지불하는 이른바 '생존 비용'은 수도권 거주자의 2배에 육박한다. 지방에 거주하는 것 자체가 의료비 측면에서는 일종의 '징벌적 과세'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의료 격차의 그늘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짙게 드리운다. 지난 5년간(2018~2022년) 비수도권 거주 10세 미만 소아암 환자 5천787명과 70대 이상 고령 환자 5만5천511명이 치료를 위해 장거리 의료 원정길에 올랐다. 5월의 뙤약볕 속에서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환아와 노인들에게 왕복 700km의 여정은 말그대로 치명적인 신체적 사투다. 생명권의 지표인 '치료 가능 사망률'도 경북이 인구 10만명당 47.91명으로 서울(36.4명)보다 약 1.3배 높다. 대구의 중증 응급환자 골든타임 내 도착률(27.4%)도 전국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인터뷰]김창곤 대구시의사회 홍보이사 "지역 의료 공동화, 방치하면 시민 '생존권' 무너진다"
김창곤 대구시의사회 홍보이사
김창곤 대구시의사회 홍보이사(율하연합가정의학과의원 원장)는 최근 영남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차 진료 현장에서 만나는 환자들 사이에는 이미 '서울 진료가 곧 정답'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신앙처럼 번져 있다"며 "이대로라면 지역 의료는 선택지가 아닌 '강요된 도태'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구는 이른바 '메디시티'를 표방하며 국내 최고 수준의 의료 인력과 인프라를 구축해왔다. 하지만 김 이사는 "일선 의료현장에서 느끼는 체감 온도는 싸늘하다"고 했다. 암 같은 중증 질환은 물론, 척추나 관절 등 지역 내에서 완결형 치료가 가능한 질환조차 환자들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수도권 상급종합병원으로 향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원정 진료에 드는 물리적 시간과 경제적 부담을 고려할 때, 서울행이 반드시 최선의 치료 결과를 담보하는 건 아니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환자가 떠나면 숙련된 의료진도 지역을 계속 지켜야 할 명분이 사라진다"며 "결국 지역 의료 역량이 퇴보해 나중에는 서울행이 '옵션'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리는 비극적인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하며 지역 의료 살리기에 나섰지만, 김 이사는 "인원 수만 늘리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고 지적했다. 쏠림 현상을 막을 정교한 제도 설계가 선행되지 않으면 늘어난 인력마저 수도권으로 흡수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시급한 과제로 '상급 병원 문턱 높이기'를 제안했다. 경증 질환자가 대형 병원을 이용할 경우 본인부담금을 대폭 상향하는 등 진료 체계를 엄격히 관리해야 한다는 것.
그는 "근본적인 구조 개선 없이는 아무리 자원을 쏟아부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밖에 없다"며 "환자가 지역에 머물도록 하는 강력한 제도적 유인책과 더불어, 정부와 지자체의 파격적인 투자를 통해 수도권을 압도할 수 있는 의료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숙련된 전문가들이 떠난 지역 대학병원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은 단순 인력 유출을 넘어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직접적인 위험 요소다. 필수의료 현장을 지키던 베테랑들이 수도권으로 이탈하면서 응급 환자의 생사를 가르는 골든타임 확보에 경고등이 켜졌기 때문이다.
그는 "의료진 부재는 결국 지역 내 응급 진료 체계의 마비로 이어진다"며 "중증 환자가 서울까지 가야 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시간적·경제적 기회비용은 오롯이 서민들의 몫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인터뷰 말미에 김 이사는 "정부의 전폭적인 행정 지원과 더불어 지역 의료의 우수성을 제대로 알리는 대국민 인식 개선이 병행되지 않으면 지역 의료의 미래는 담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강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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