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만나는 우리동네 문화유산] 면사무소 앞마당에 국보가?...‘포항 냉수리 신라비’

  • 전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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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6-28 19:35  |  발행일 2026-06-28
밭갈이 중 발견된 포항 내 유일한 국보
“포항박물관 건립 및 유네스코 등재 서둘러야”
경북 포항 신광면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위치한 국보 포항 냉수리 신라비. <전준혁기자>

경북 포항 신광면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위치한 국보 '포항 냉수리 신라비'. <전준혁기자>

초여름의 짙은 녹음이 내려앉은 6월 말,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은 일상을 오가는 주민들의 발걸음으로 평화롭다. 잘 꾸며진 나무 벤치와 푸른 조경수 사이, 붉은 기둥의 전통 비각 하나가 우뚝 서 있다. 그 속에는 투박하고 거친 형태의 자연석 하나가 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여 고이 모셔져 있다. 바로 신라시대의 생생한 삶의 흔적과 치열했던 법적 공방을 품고 있는 국보 제264호, '포항 냉수리 신라비'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 비각과 알림판. <전준혁 기자>

포항 냉수리 신라비 비각과 알림판. <전준혁 기자>

◆ 밭을 갈다 우연히 마주한 1천500년 전 신라 귀족들의 공문서


평범한 돌덩이처럼 보이는 이 비석이 세상의 빛을 본 과정은 극적이다. 1989년 4월, 신광면 냉수리의 한 밭에서 농사일을 하던 주민의 쟁기에 걸려 우연히 발견됐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이 돌은 전문가들의 조사를 통해 포항 지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라비 중 하나로 밝혀지며 단숨에 국보로 승격됐다. 이 비석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불규칙한 사다리꼴 형태의 자연석을 그대로 활용했다. 흥미로운 점은 앞면에만 글자를 새긴 일반적인 비석과 달리, 앞면과 뒷면, 그리고 비석의 윗면까지 글자를 새겨 넣었다는 것이다. 전체를 합쳐 총 231자의 글자가 남아 있어 당시의 시대 상황을 정확하게 판독할 수 있다. 돌에 새겨진 기록은 놀랍게도 1천500년 전 신라시대에 벌어진 일종의 '재산권 분쟁 판결문'이다. 비문에 따르면, 진이마촌에 살던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권과 유산 상속을 두고 다툼이 발생했다. 이에 503년(지증왕 4년), 갈문왕을 비롯한 신라의 최고위 귀족 7명(7왕)이 모여 이 사안을 공론에 붙였다. 이들은 선대 왕들의 과거 판례를 증거로 삼아 재물은 모두 절거리가 차지하도록 하라는 명확한 판결을 내렸다. 판결이 끝난 후에는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인 '살우(煞牛)'를 행하며, 하늘의 뜻을 빌려 다시는 이 재산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엄중한 맹세를 남기기도 했다.


정면에서 바라본 냉수리 신라비. <전준혁기자>

정면에서 바라본 냉수리 신라비. <전준혁기자>

◆ 율령 반포 이전의 법제와 지증왕의 비밀을 푸는 열쇠


냉수리 신라비는 단순한 재산 다툼의 기록을 넘어, 신라가 어떻게 국가의 기틀을 다졌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료다. 신라가 정식으로 율령을 반포한 것은 520년(법흥왕 7년)의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세워진 이 비석을 통해, 신라 중앙 정부가 이미 과거의 판례를 바탕으로 지방민의 사적인 분쟁에 직접 개입하고 판결을 내리는 체계적인 법적 절차를 갖추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명수 포항문화역사길라잡이 회장은 "냉수리 신라비는 삼국사기 등 문헌에 기록된 고대사를 온전하게 뒷받침해 주는 완벽한 금석문"이라며 그 문화재적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는 지증왕이 500년에 즉위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503년에 세워진 이 비석에서는 그가 왕이 아닌 '지도로 갈문왕(至都盧 葛文王)'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지증왕이 권력을 잡은 후에도 정식 국왕에 오르지 못하고 한동안 갈문왕 체제로 국정을 운영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밝혀낸 결정적 증거가 됐다.


후면에서 바라본 냉수리 신라비. <전준혁기자>

후면에서 바라본 냉수리 신라비. <전준혁기자>

◆ 세월의 풍파에 노출된 포항 유일의 국보


국보라는 위상에 비해, 냉수리 신라비가 처한 현실은 냉혹하다는 비판이 있다. 현재 신광면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의 좁은 비각 속에 놓인 비석은 오랜 세월 풍파에 노출돼 있다. 아무리 천 년을 넘게 버틴 비석이라지만, 현재 외부 환경 변화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외지인은 물론 인근 포항 시민들조차 이곳에 국보가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접근성과 홍보도 부족한 실정이다. 이에 대해 최명수 회장은 "중성리 신라비가 경주 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상황에서, 냉수리 신라비는 포항 관내에 소재한 유일한 국보"라며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다만 열악한 보존 상태에 대해서는 "울진 봉평리 신라비처럼 단독 전시관을 짓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며 "현재 포항시가 추진 중인 포항박물관이 건립되면 그곳으로 안전하게 옮겨 보존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라고 설명했다. 즉 박물관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현 위치에서 더 이상의 훼손을 막는 철저한 관리가 시급하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와 비각 전경. <전준혁기자>

포항 냉수리 신라비와 비각 전경. <전준혁기자>

◆ '신라 동해안 3비' 세계기록유산 등재,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최근 학계에서는 '포항 중성리 신라비', '포항 냉수리 신라비', '울진 봉평리 신라비'를 묶어 '신라 동해안 3비'로 명명하고, 이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고 있다. 일본의 경우 이미 자신들의 고대 석비인 '고즈케 3비'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시키며 그 가치를 전 세계에 알렸다. 일본 석비 문화의 원류가 6~7세기 신라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원류인 우리 동해안 3비의 등재는 신라사의 세계적 위상을 높이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신라 동해안 3비는 동아시아 한자 문화가 확산하는 과정에서 신라만의 독특한 변용을 보여주는 귀중한 실물 증거다. 일관된 시기와 지역에서 국가가 지방민을 통치하고 사법 행정을 처리한 과정을 생생하게 담고 있어 인류의 보편적 기록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 1천500년 전, 왕경의 귀족들이 포항 신광까지 내려와 촌락 분쟁을 해결하고 비석을 세웠던 그 정성은 단순한 판결을 넘어 공동체의 평화를 향한 의지였다. 언제까지 우리의 소중한 국보를 비바람 부는 면사무소 앞마당에 방치할 수는 없다. 안전한 박물관으로의 이전 보존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라는 과제를 완수하는 것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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