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의회 본회의장. 영남일보DB
지난 6·3 지방선거에서 자신의 공약을 유권자에게 한 번도 알리지 못한 채 임기를 시작한 지방의원들이 있다. 상대 후보가 없어 투표 없이 당선이 확정된 '무투표 당선인'들이다. 취재 결과 공약을 미리 준비해 놓고도 공개하지 못해 아쉬움을 토로하는 의원이 있는가 하면, 공약의 중요성 자체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 의원도 적지 않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투표 당선으로 의회에 입성한 대구·경북 지방의원은 대구시의원 1명, 경북도의원 23명, 대구 구의원 11명, 경북 시·군의원 15명 등 총 50명(지역구 기준)이다. 여기에 비례대표 무투표 당선자 20명을 더하면 모두 70명에 달한다.
이들은 후보자 등록 마감과 동시에 경쟁 후보가 없어 투표 없이 당선이 확정됐다. '보수의 텃밭'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국민의힘 공천만으로 사실상 당선이 확정되는 선거구가 적지 않았던 탓이다.
무투표 당선 제도는 후보자 수가 의원 정수를 넘지 않을 경우 선거운동을 중지하도록 한 제도로, 1948년 제헌국회 당시 국회의원선거법에 처음 도입돼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현행 공직선거법 제190조 제2항도 후보자 수가 해당 선거구 의원 정수를 넘지 않을 경우, 투표를 실시하지 않고 선거일에 당선인을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무투표 당선이 확정되는 즉시 선거운동도 중단된다는 점이다. 공직선거법 제275조에 따라 해당 선거구의 모든 선거운동이 금지되며, 이를 위반해 선거공보물을 배포하거나 정책을 알리는 선거운동을 실시한다면 공직선거법 제261조 제6항 제1호에 따라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이 때문에 무투표 당선인들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유권자들에게 공약과 정책을 설명할 공식적인 기회를 갖지 못한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대구·경북에서만 모두 70명의 지방의원들이 자신의 공약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채 임기를 시작했다. 대구·경북 전체 지방의원 515명의 13.6%에 해당하는 규모다. 지역 지방의원 10명 중 1명 이상이 공약을 충분히 알리지 못한 채 의정활동을 시작한 셈이다.
당선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지방의회 홈페이지에는 의원 공약을 공개하는 공간이 없어 주민들은 선거가 끝난 뒤에도 무투표 당선인들이 어떤 약속을 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프=AI 제미나이 제작
취재 과정에서 만난 무투표 당선인들의 인식은 엇갈렸다. 공약을 미리 준비한 일부 당선인들은 아쉬움을 토로하며 현행 제도의 한계를 지적했다.
무투표 당선으로 대구 북구의회에 입성한 더불어민주당 안경완 의원은 "최소한 제가 출마했고 당선됐다는 인사 정도는 주민들께 드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마저 모두 막혀 있어 아쉬웠다. 일부 주민들은 경선에서 떨어진 줄 알기도 했다"며 "정책과 비전을 유권자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김광호 고령군의원도 "초선 의원인 만큼 정책선거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왔는데, 선거공보물조차 만들 수 없어 주민들에게 알리지 못한 점이 가장 아쉬웠다"며 "앞으로 의정활동을 통해 주민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취재진의 공약 자료 요청에 "미리 만들어 뒀지만 공개하지 못한 공약들이 있었다"며 준비해 둔 공약을 적극 제공한 의원도 있었다.
반면 일부 의원들은 공약 공개를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A의원은 "이미 무투표로 당선됐는데 언론사에 공약 자료를 제공하면 나중에 못 지켰을 때 득이 될 것이 없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B의원은 "의정활동을 하는 게 다 공약 이행인데, 굳이 정리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지방의원의 권한이 제한적이라는 현실을 이유로 든 의원도 있었다. C의원은 "국회의원의 의중과 지자체의 예산 확보 여부에 따라 사업 추진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며 "지방의원은 의견을 낼 수는 있어도 원하는 대로 모든 사업을 추진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지방의회 개원을 코앞에 두고 "아직 공약을 따로 정리하거나 계획한 것이 없다"는 의원도 다수였다.
전문가들은 유권자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지방의원의 책임감을 높이기 위해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무투표 당선'에 대해 "선거관리위원회 위주의 선거 제도가 어떤 문제를 발생시키는지 다시 고민할 필요가 있다"며 "무투표 당선이라고 해도 후보자는 공약을 준비했을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유권자에게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약으로 봐야 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했다. 이어 "당선 이후에 공약을 이제부터 생각하겠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을 모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선관위 관계자는 "선거운동 자체를 허용하려면 법 개정이 필요하지만, 당선 이후 무투표 당선인의 공약 자료를 정책공약마당 등에 공개하는 방식은 운영 개선만으로도 가능하다"며 "무투표 당선인과 일반 당선인의 형평성, 유권자의 알 권리 보장 측면에서 제도 개선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한발 더 나아가 무투표 당선 제도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장우영 대구가톨릭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단독 후보자들도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유권자에게 자신의 정책과 비전을 설명하고, 추인받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무투표 당선 제도가 유지되는 가장 큰 이유는 선거 관리의 편의성 때문인데,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 역시 행정 편의주의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 민선 9기 대구·경북 지방의원들의 공약은 영남일보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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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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