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전 비가 그친 후 찾아간 칠곡 송림사. 일주문 너머로 대웅전과 사찰의 전경이 들어온다. 마준영 기자
21일 오전 경북 칠곡군 동명면에서 팔공산 자락을 향해 차를 몰았다. 도로를 벗어나 송림사로 들어서자 주변 풍경부터 달라졌다. 산이 가까워지고 차량 소리도 서서히 멀어졌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섰다. 화려하거나 웅장한 사찰은 아니다. 경내도 넓지 않다. 그런데 몇 걸음 옮기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위로 향했다.
대웅전 앞에 우뚝 선 오층전탑 때문이다.
송림사 대웅전 앞에 우뚝 선 오층전탑. 탑 상륜부의 금동 장식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신라 전탑 양식의 진수를 보여준다. 마준영 기자
돌을 깎아 만든 석탑과 달리 작은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린 탑이다. 높이는 16.13m.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규모가 실감났다. 층마다 조금씩 좁아지는 탑신 위로 금속제 상륜부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이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됐으며, 국내에 남아 있는 전탑 가운데 원형을 비교적 잘 간직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다.
탑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멀리서는 하나의 거대한 탑처럼 보였지만 가까이에서는 작은 벽돌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딘 흔적도 곳곳에서 느껴졌다.
이 탑을 바라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송림사의 긴 역사로 시선이 옮겨간다.
21일 오전 비가 그친 후 찾아간 송림사 경내 모습. 정갈한 잔디 마당과 어우러진 천년고찰은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명찰로 평가받고 있다. 마준영 기자
송림사는 신라 진흥왕 5년인 544년 명관 스님이 중국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올해로 창건 1482년을 맞는다.
그러나 송림사의 역사가 늘 평온했던 것은 아니다.
1235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사찰이 폐허가 됐고, 다시 중창됐지만 1597년에는 왜군의 방화로 또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몽골군도 지나갔고 왜군도 지나갔다.
왕조가 바뀌는 동안 전각은 불타고 다시 세워졌다. 그렇게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
전탑의 역사도 그만큼 깊다.
1959년 전탑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탑 내부에 봉안됐던 유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1층 탑신에서는 불상이, 2층에서는 거북 모양의 석함이 발견됐다.
석함 안에서는 금동으로 만든 전각 형태의 사리기와 녹색 유리잔, 유리 사리병 등이 나왔다. 5층 옥개석 위에서도 고려시대 유물이 발견됐다.
천년 넘게 탑 안에 잠들어 있던 불교문화의 흔적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다시 전탑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16m가 넘는 독특한 벽돌탑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면, 그 유래를 알고 난 뒤에는 탑 자체가 하나의 역사 공간처럼 다가왔다. 신라와 고려, 조선의 시간이 벽돌 사이에 켜켜이 쌓여 있는 듯했다.
전탑을 뒤로하고 대웅전으로 향했다.
몇십 걸음이면 닿는다. 대웅전은 조선시대에 중창된 건물로 역사적·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1년 보물로 지정됐다.
법당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거대한 삼존불이었다.
송림사 대웅전에는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이 모서져 있다. 사진의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자리하고 있다. 마준영 기자
가운데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자리하고 있다. 1657년에 조성된 '칠곡 송림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이다. 석가여래상만 높이가 2.77m에 이른다. 가까이에서 올려다보면 그 크기가 더욱 실감난다. 이 불상은 2009년 보물(제1605호)로 지정됐다.
석조삼장보살좌상과 목조시왕상이 자리하고 있는 송림사 명부전 내부 모습. 마준영 기자
대웅전을 나와 명부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명부전에는 1665년 조성된 석조삼장보살좌상과 목조시왕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밖에도 석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등 오랜 세월을 견뎌온 문화유산들이 경내 곳곳에 남아 있다.
송림사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경내 규모는 크지 않지만 오랜 역사와 문화유산이 한곳에 모여 있다. 몇 걸음만 옮겨도 수백 년 된 불상과 전각을 만나고, 고개를 돌리면 천년이 넘는 전탑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고 박물관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법당에서는 지금도 예불이 이어지고, 사람들은 합장하며 경내를 오간다. 문화유산이 유리 진열장 속에 박제돼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사찰을 구성하는 일부로 살아 숨 쉬고 있다.
경내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아 다시 오층전탑 앞에 섰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높이 16.13m의 독특한 벽돌탑이었다. 하지만 사찰 곳곳을 둘러보고 다시 바라본 전탑은 달랐다.
1235년 몽골군의 침입을 견뎠고, 1597년 왜군의 방화도 견뎠다. 전각이 불타고 다시 세워지는 동안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 전탑 앞은 조용하다.
사람들은 탑 주변을 천천히 걷고 사진을 찍는다. 누군가는 대웅전으로 향하고, 누군가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탑을 올려다본다.
평범해 보이는 그 풍경 뒤에 1500년에 가까운 시간이 겹쳐 있다.
일주문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다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대웅전 앞 오층전탑이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몽골군도 지나갔다. 왜군도 지나갔다.
수많은 사람이 떠났고 왕조도 바뀌었다. 그러나 팔공산 자락의 작은 산사 송림사는 긴 시간을 견디며 오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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