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설 사회2팀장
박규주 서울대병원 대장항문외과 교수는 30년간 1천명이 넘는 대장암 환자의 수술을 집도했다. 최근 한 방송에서 '대장암 명의'로 소개된 그가 진료실에서 뱃살이 쪘다며 환자에게 호통치는 모습, 암이 전이된 환자가 울자 같이 마음 아파하는 것을 봤다. 암 수술을 하는 의사로서 "아무리 작은 확률이라도 당사자에겐 100%라는 마음가짐으로 임한다"는 소신을 밝힐 때 감명 깊었다.
특히 기자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이 명의의 필기 노트. 박규주 교수는 진료실에서 컴퓨터 자판 대신 환자 상태와 수술 경과를 펜으로 기록한 노트를 빼곡히 작성해 오고 있다. 대형마트에 갈 때 끌고 가는 이동식 캐리어에 그간 작성한 수십 권의 노트를 싣고 병원을 누볐다. 명의는 필요하면 지체 없이 노트를 찾아 펼쳤다. 거기엔 수많은 대장암 환자들의 대장이 미술학도의 스케치북을 보듯 그려져 있었고, 진료소견과 수술 경과, 환자가 건넨 이야기까지 자신만의 글씨, 기호, 그림으로 세밀하게 담겨 있었다.
수기로 진료 차트를 쓰는 이유에 대해선 "환자와 눈을 맞추며 대화하기 위해서"라고 짧게 답했다. 컴퓨터 자판을 치며 규격화된 항목만 입력하다 보면, 환자가 무심코 건네는 질환에 대한 특이사항을 놓치기 쉽다는 것.
실제로 병원의 전자의무기록(EMR) 도입 후 의사가 환자와 아이 콘택트를 하는 시간이 수기 차트 때보다 40% 이상 급감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 수기 차트는 명의에게 정교한 치료 도구였다. 사람마다 대장 모양과 혈관 위치, 장 유착 상태가 달라 암 수술의 성패는 장의 미세한 지형도를 파악하는 데 달려 있다. 수년 뒤 암이 재발해 환자가 다시 수술대에 올랐을 때, 명의는 직접 그려둔 대장 스케치를 찾아 펼쳤다. 그는 "대장의 입체적 잔상을 복기하는 이 과정은 수술 시간을 단축하고 치명적인 출혈 위험을 막아냈다"고 회상했다. 펜촉을 눌러 쓴 노트 한권이 누군가의 재발을 막는 가장 강력한 수술 지형도가 된 셈이다.
진료실 밖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목격했다. 대구지역 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우연히 초등학교에 들렀다가 개원을 결심했다고 했다. "연필로 글씨를 따라 쓰는 시간이 확 줄었더라.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수업을 하더라"는 게 이유였다. 그는 손가락 오감을 통한 자극이 사라진 교실에서 정서 불안, 인지적 불균형을 겪는 아이들이 늘어날 것이란 예측을 했던 것 같다.
노르웨이 과학기술대(NTNU)의 뇌전도 측정 연구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실험 대상자가 키보드를 칠 때는 뇌의 국소 부위만 자극됐지만, 펜을 쥐고 글씨를 쓸 땐 뇌 전체의 신경망이 폭발적으로 활성화됐다. 또 막연한 우울과 불안을 글씨로 직접 써 내려갈 때 뇌의 감정을 맡는 편도체의 과열이 멈추고, 이성의 전두엽이 깨어났다. 펜 끝의 물리적 압력을 체감하면서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고, 비로소 불안을 다스리는 내면의 힘이 생겨난 것이다.
AI와 빅데이터가 사회 전반을 바꾸고 있다. AI가 일하는 사람을 대체하고, 인간의 땀과 노력의 과정보다 데이터에 기반한 보다 신속한 결과물만 숭배하는 세태가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모든 것을 데이터화할 수 있을까.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 영역은 존재한다. 사람의 감정, 현장에서 느끼는 미세한 뉘앙스, 관계의 맥락이야말로 삶의 정수가 아닐까. 데이터를 훑어내는 사회는 더 정교해지겠지만, 타인의 아픔이나 현장의 숨소리를 읽어내는 능력을 퇴화시킬 것이다. 이 시대, 우리 사회가 진정 회복해야 할 것을 명의가 쓴 빛바랜 노트 한권에서 발견해 다행스럽고, 또 씁쓸하다.
이효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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