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으니까 하늘은 높아졌고 모든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곧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게티이미지뱅크
곧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갑자기 추워졌으니 갑자기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대구는 눈이 잘 쌓이지 않는다. 눈이 귀한 곳이다. 눈을 떠올리면 당장에 드는 감정은 애틋함이지만, 군대에서 징그럽게 눈을 치웠던 기억이 나면 짜증이 밀려온다.
군인들은 눈을 치워야 한다. 눈을 치우는 일이 고된 이유는 눈이 멈추고 나서 치우는 것이 아니라 눈이 내리고 있는 중에 치워야 하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없다거나 자동차가 눈에 미끄러지는 일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 군대에서는 눈이 쌓이지 않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눈이 오는 중에 눈을 치워야 했다. 그러니까 보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내가 눈을 쓸고 간 자리에는 바로 눈이 쌓였고, 뒤따라오는 사람도 눈을 치웠고, 그 뒤에 같은 길에 쌓인 눈을 치우며 앞으로 간다. 성취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행동을 반복해야만 했다. 전역을 하고 눈이 잘못한 것이 없지만 용서를 할 시기에 말이다. 내가 하고 있는 문학이라는 것이 군대에서 제설을 했던 일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결국 문학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자기 몫의 눈을 치워야만 한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뒤따라오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 눈앞에 있는 눈을 다 치운 후에야 자기만의 문학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징그러운 반복이 참 닮았다고 생각한다.
"수업이 심심하게 느껴지는 겨울날 오후에는 옆자리 애랑 내기하며 놀았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하는 내기이다. 먼저 창문 밖에서 풀풀 나는 눈송이 속에서 각자가 눈송이를 하나씩 뽑는다. 건너편 교실 저 창문 언저리에서 운명적으로 뽑힌 그 눈송이 하나만을 눈으로 줄곧 따라간다. 먼저 눈송이가 땅에 착지해버린 쪽이 지는 것이다. "정했어." 내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나도" 하고 그 애도 말한다. 그 애가 뽑은 눈송이가 어느 것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지만 하여튼 제 것을 따라간다. 잠시 후 어느 쪽인가 말한다. "떨어졌어." "내가 이겼네." 또 하나가 말한다. 거짓말해도 절대로 들킬 수 없는데 서로 속일 생각 하나 없이 선생님 야단맞을 때까지 열중했다.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 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 아직도 눈보라 속 여전히 눈송이는 지상에 안 닿아 있다."(눈보라, 사이토 마리코)
한국어를 배운 일본인이 한국어로 쓴 시라고 들었다. 타국의 언어로 쓴 시는 나의 과거를 꾸며 준다. 마치 나도 과거에 저렇게 친구와 놀아본 적이 있었던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고는 한다. 그렇게 특별할 거 없는 내 학창 시절이 갑자기 좋아지기도 한다. 이 시에 어떤 힘이 있기에 그런 걸까. 현실에서 있을 법하면서도, 누군가는 "누가 그렇게 놀아?" 하고 물을 만한 놀이가 시 속에 등장한다. 거짓말을 해도 아무도 모르지만 정직하게 나의 눈송이를 찾아 선택하고 떨어지는 궤적을 함께 살피게 된다. 이 글에는 속도가 있다. 문장을 읽어내는 나의 속도. 시 안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속도. 그 속도가 직구와 같은 것이 아니라 좋다. 알맞은 시의 시간을 품고 있달까. 겨울이 배경인 시지만, 마음이 여유로운 계절 한 모퉁이에서 이 시를 다시 읽고는 한다. 떨어지는 것이 비이거나 단풍이거나 감일지도 모른다(새벽 산책 중 감이 실린 박스에서 감이 우르르 쏟아지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나한테 제일 먼저 굴러온 감을 주인은 가져가라고 했다).
징그러웠던 눈을 조금은 용서하게 된다. 맞다. 눈은 처음부터 아무 잘못도 없었으니까. 내가 오래 바라본 눈송이가 없었을 뿐. 천천히 떨어지는 단 하나의 눈송이를 가지고 싶다.
안미옥 시집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문학동네 제공
"노래는 후렴부터 시작합니다 / 후렴에는 가사가 없어요 / 사랑 노래입니다 // 노래를 듣는 사람들에게 /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 모르겠어요 잘하고 있는 건지 / 마지막에 했던 말을 자꾸 번복합니다 // 주소도 없이 /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엽서도 있습니다 // 모든 일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 나는 궁금합니다 // 꽃병에 담긴 물은 / 언제부터 썩을까 // 믿음을 강조하던 사람이 / 귀퉁이에 써놓은 작은 메모를 볼 때마다 알게 됩니다 / 그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 꽃은 식탁 위에 뒀습니다 / 활짝 핀 꽃은 마르면서 작은 꽃으로 자랍니다 // 말린 꽃의 온도 / 깨진 조각을 공들여 붙인 그릇의 모양으로 / 오늘도 웃게 됩니다 // 어느 날엔 /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 긴 울음은 이해가 되는데 긴 웃음은 / 무서워서 // 이 꿈이 빨리 깨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 왜 슬픔이 아니라 공포일까 // 이해는 젖은 신발을 신고 / 신발이 다시 마를 때까지 달리는 것이어서 // 웃음은 슬프고 따듯한 물 한 모금을 / 끝까지 머금고 있는 것이어서 // 깨어난 나는 / 웃는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 다음 페이지를 열고 /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나와요 // 사랑 노래입니다 // 그냥 배울 수는 없고요 / 보고 배워야 가능합니다 //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안미옥 시집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중 '사운드북')
이해하고 이해받는 것이 가장 어렵다.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선택. 그런 것들이 나를 이룬다. 누군가를 믿게 하고 누군가를 싫어하게 만들고 정말 어찌할 수 없이 그를 사랑하게 한다. '이해는 젖은 신발을 신고 / 신발이 다시 마를 때까지 달리는 것이어서'라고 시인은 말한다. 신발이 마르는 동안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건과 생각이 그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무언가를 정의 내린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했다는 이야기일 테고 나는 아직 문학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정의할 수 있는 바가 없다. 정의할 수 없는 문장의 나열들. 옳고 아님 사이에서 갈등하는 단어들. 그것이 나의 가을을 채워준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으니까 하늘은 높아졌고 모든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좋은 쪽으로 말이다. 갑자기 사랑할 수도. 갑자기 이해받고 싶어지기도 하고. 갑자기 누군가의 수상소감을 찾아보기도 한다. 갑자기 일어나는 일에서 우리가 당황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이름 없이 내렸던 눈송이에게 말을 걸어주는 것으로 다음 계절을 준비해 보자. 갑자기 모든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