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만나는 우리동네 문화유산] 경주읍성 ‘주인 잃은 비석’ 29기…옛사람들은 누구를 위해 돌을 세웠을까

  • 장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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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10-11 12:18  |  발행일 2026-10-11
1587년 부윤 선정비부터 1903년 군인 송덕비까지 한자리
“죽담에 박히고 마루 밑에도”…돌볼 후손 사라지며 방치
황성공원 호림정 거쳐 경주읍성으로…길 따라 흔적 추적
경주읍성 향일문 아래에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옛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다. 경주 곳곳에 흩어졌던 선정비와 영세불망비, 효자비 등 29기는 황성공원 호림정 뒤편을 거쳐 2025년 현재 자리로 옮겨졌다. 장성재기자

경주읍성 향일문 아래에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옛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다. 경주 곳곳에 흩어졌던 선정비와 영세불망비, 효자비 등 29기는 황성공원 호림정 뒤편을 거쳐 2025년 현재 자리로 옮겨졌다. 장성재기자

비석 하나를 취재하다 또 다른 29기의 비석을 만났다.


얼마 전 분황사 인근 창렬각을 취재한 뒤 박임관 경주문화원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박 원장이 문득 "황성공원에 모아뒀던 비석들이 지금은 경주읍성 쪽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궁금해졌다.


황성공원에서 부터 걸음을 시작했다. 나무가 터널처럼 이어진 공원길을 빠져나와 도심으로 들어섰다. 성동동 동문로에 접어들자 한쪽에서는 경주읍성 성벽 복원공사가 한창이었다. 긴 가림막을 따라 걷자 복원된 성벽과 향일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복원된 경주읍성 향일문. 황성공원에서 도심을 지나 걸어오면 만나는 경주읍성의 동쪽 문. 장성재기자

복원된 경주읍성 향일문. 황성공원에서 도심을 지나 걸어오면 만나는 경주읍성의 동쪽 문. 장성재기자

향일문을 통과해 오르편에 비석 29기가 줄지어 서 있었다.


첫 느낌은 뜻밖에도 '묘지 같다'는 것이었다. 크기도, 색도, 머릿돌의 생김새도 모두 달랐다. 반듯한 돌 옆에는 지붕처럼 머릿돌을 얹은 비가 있었고, 구름이나 꽃을 닮은 무늬를 새긴 것도 있었다.


세워진 시대마저 제각각이었다. 서로 다른 시간을 건너온 돌들이 한데 모인 모습은 마치 시대를 초월한 '비석들의 무덤'처럼 보였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안내된 29번으로 불리는 '이부윤선정비'다. 이현배가 1585년 경주부윤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파직됐고, 비는 그가 떠난 뒤인 1587년 세워졌다. 관직에서는 물러났지만 누군가는 그의 이름을 돌에 남겼다.


시간을 300년 넘게 건너면 3번 '진위대 육군참령 구연하 송덕비'를 만난다. 구연하가 1902년 경주 진위대에 부임한 뒤 이듬해인 1903년 세워진 비다. 29기의 비석 사이 몇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 조선 선조 때에서 대한제국까지 건너가게 된다.


경주읍성 아래 한자리에 모인 옛 비석들. 반듯한 비신부터 지붕 모양과 구름·꽃무늬를 새긴 머릿돌까지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다. 건립 시기도 16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300년 넘는 차이가 난다. 장성재기자

경주읍성 아래 한자리에 모인 옛 비석들. 반듯한 비신부터 지붕 모양과 구름·꽃무늬를 새긴 머릿돌까지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다. 건립 시기도 16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300년 넘는 차이가 난다. 장성재기자

사연도 제각각이다.


'이영장 상원비'는 1631년 처음 세운 뒤 1702년 후손이 경상도 좌병사로 왔을 때 옮겨 세웠고, 1772년에는 또 다른 후손이 경주부윤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중건됐다. 한 사람의 비석을 후손들이 140여년에 걸쳐 챙긴 셈이다.


반면 '부윤 조준구 청덕비'의 주인공은 1887년 7월 경주부윤으로 부임해 같은 해 10월 밀양부사로 옮겼다. 경주에서 머문 기간은 불과 3개월 남짓이었다. 그래도 그의 이름은 돌에 새겨졌다.


'부윤 김원성 청덕거사비'에는 흉년이 들자 백성을 진휼했다는 내용이, '부윤 이능섭 영세불망비'에는 재목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생긴 폐단과 주민부담을 줄였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비석을 하나씩 읽다 보니 자연스레 궁금증이 생겼다.


옛사람들은 왜 임기를 마치면 떠날 관리에게 큰 돌까지 세워 이름을 남겼을까.


박임관 원장은 "부윤이든 목사든 지역민을 위해 일을 잘했다고 하면 주민들이 선정비나 송덕비, 불망비를 세웠다"며 "흉년에 곡식을 풀거나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준 것을 고맙게 여기고 오래 기억하려 한 것"이라고 말했다.


경주읍성 비석군 가운데 1587년 세워진 이부윤선정비와 1903년 세워진 진위대 육군참령 구연하 송덕비. 두 비석의 건립 시기는 300년 넘게 차이 나지만 현재는 같은 공간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장성재기자

경주읍성 비석군 가운데 1587년 세워진 '이부윤선정비'와 1903년 세워진 '진위대 육군참령 구연하 송덕비'. 두 비석의 건립 시기는 300년 넘게 차이 나지만 현재는 같은 공간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장성재기자

다만 돌에 새겨진 칭송이 모두 순수한 감사만을 뜻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박 원장은 "조선 말기로 가면 지방관이 자기가 떠날 때 비 하나 세우라고 부추기는 일도 있었다"며 "그게 폐단이 돼 조정에서 못 세우게 한 경우까지 있었다"고 했다.


수백 년 전에는 사람들이 돈과 정성을 들여 세웠던 돌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아무도 찾지 않는 비석이 됐을까.


박 원장은 그 배경으로 지방관의 '피향'을 들었다. 자신의 고향에는 지방관으로 발령하지 않는 관행 때문에 경주에 온 부윤이나 목사 등은 대부분 타지 사람이었다. 재임기간도 길지 않았고 임기가 끝나면 다시 떠났다.


"경주 출신자가 거의 없었어요. 오래 있지도 않았고요. 후손이 경주에 있으면 우리 할아버지 비석이라고 챙기겠지만 그런 사람이 없는 거죠."


돌 볼 사람이 사라진 비석의 처지는 시간이 흐르며 초라해졌다.


경주읍성 향일문 인근에 모여 있는 옛 비석들. 둥근 머릿돌을 얹은 비부터 지붕 모양, 아무 장식 없는 비까지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다. 장성재기자

경주읍성 향일문 인근에 모여 있는 옛 비석들. 둥근 머릿돌을 얹은 비부터 지붕 모양, 아무 장식 없는 비까지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다. 장성재기자

박 원장은 과거 경주지역 비석을 조사할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어떤 것은 죽담에 들어가 있었고, 어떤 것은 반토막이 나 마룻바닥 밑에 들어가 있었어요. 글자가 있는 면을 뒤집어서 돌담으로 써놓은 것도 있었죠."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도로를 넓히거나 포장하면서 길가에 있던 비석이 묻히거나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했다.


박 원장은 2000년대 후반 문화단체에서 경주시에 "더 없어지기 전에 조사라도 해야 한다"고 계속 건의했고, 이후 경주 일대에 흩어진 비석을 조사해 자료로 정리하는 작업이 이뤄졌다고 기억했다.


조사 범위는 지금의 경주시만이 아니었다. 과거 경주의 행정권역이 넓었던 만큼 포항 기계와 신광 등지에서도 경주 지방관의 선정비가 확인됐다고 했다. 경주의 세입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지역 일부를 경주 관할로 두던 시기가 있었고, 그곳 주민들이 경주부윤의 도움을 받고 비를 세운 사례도 있었다는 설명이다.


경주읍성에서 비석들이 이전까지 머물렀던 황성공원 호림정으로 돌아가는 길. 읍성을 출발해 도심과 북천을 지나 황성공원 숲길로 들어섰다. 장성재기자

경주읍성에서 비석들이 이전까지 머물렀던 황성공원 호림정으로 돌아가는 길. 읍성을 출발해 도심과 북천을 지나 황성공원 숲길로 들어섰다. 장성재기자

흩어진 비석 가운데 상당수는 이후 황성공원 호림정 뒤편으로 모였다.


그러나 그곳도 마땅한 자리는 아니었다. 건물 뒤쪽의 음지여서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았고 이끼가 끼는 등 관리 여건도 좋지 않았다.


박 원장은 "경주를 위해 일했던 사람들의 비석을 사람들이 가지도 않는 곳에, 골방에 버리듯 해놨다는 말도 나왔다"며 "그래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제대로 모으자는 이야기가 계속 있었다"고 말했다.


현장 안내판에는 호림정에 있던 비석 29기를 2025년 현재의 경주읍성 인근으로 옮겼다고 적혀 있다.


비석을 보고 난 뒤 이번에는 그 돌들의 '전 주소'를 찾아 다시 황성공원으로 걸었다.


읍성을 뒤로하고 도심을 지나 북천을 건넜다. 다시 황성공원의 긴 숲길로 들어섰고 경주시궁도협회 안내판을 지나 호림정에 도착했다. 읍성에서 걸어서 약 30분이 걸렸다.


호림정에서는 궁도협회 회원들이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비석이 있던 곳을 묻자 한 회원이 건물 뒤편을 가리켰다.


경주 황성공원 호림정 뒤편의 옛 비석군 자리. 경주 곳곳에서 모인 비석들이 한때 이 그늘진 공간에 서 있었지만 29기가 경주읍성으로 옮겨진 뒤 현재는 빈터로 남아 있다. 장성재기자

경주 황성공원 호림정 뒤편의 옛 비석군 자리. 경주 곳곳에서 모인 비석들이 한때 이 그늘진 공간에 서 있었지만 29기가 경주읍성으로 옮겨진 뒤 현재는 빈터로 남아 있다. 장성재기자

나무와 건물 사이 그늘진 빈터였다.


지금은 풀과 흙만 남아 있어 불과 얼마 전까지 이곳에 수십기의 오래된 비석이 줄지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 회원은 "호림정이 자리 잡을 무렵 비석들도 함께 옮겨온 것으로 알고 있다"며 "건물 뒤쪽 음지에 있어 보기 좋지 않다는 주민들과 문화단체의 민원이 계속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호림정 뒤에는 비석이 떠난 자리만 남았다.


29기의 돌은 이제 경주읍성에서 다시 사람들 앞에 섰다. 비석에 새겨진 것은 한 관리의 이름만이 아니다. 그를 칭송했던 이유와 당시 백성들이 겪었던 삶의 흔적도 함께 남아 있다.


비석을 옮기는 일은 끝났지만, 그 돌을 읽는 일은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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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재

동부지역본부 소속입니다. 경주의 현장을 기록하고 지역의 변화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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