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원류.지류를 찾아 .5] 신라이야기(4)

  • 입력 2003-02-04 00:00

기원전 57년에 건국된 신라는 많은 경쟁상대와 싸워야 했다. 5대 파사
이사금이 재위 8년(87) "짐이 덕이 없이 이 나라를 가져 서쪽으로는 백제
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접했다"는 토로가 이런 상황을 잘 말해주
고 있는데, 비단 백제.가야뿐만 아니라 마한과 낙랑.말갈도 신라와 부대끼
는 상대였다. 그중 신라보다 일찍 건국한 마한은 시조 혁거세왕이 먼저 호
공(瓠公)을 보내 문안해야 할 정도로 강한 국가였다.

'삼국사기'의 해당 기록을 보자. '호공을 보내어 마한을 방문하게 했더
니 마한왕이 호공에게, "진한과 변한은 나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직공(職貢
:벼슬에 따른 공물)을 바치지 않으니 사대의 예가 이럴 수 있는가"라고 꾸
짖었다. 이에 호공은, "우리나라는 두 성인(聖人:혁거세와 알영)이 일어나
인사(人事)를 닦자 하늘이 화합해 창고는 가득 차고 인민들은 서로 존경하
고 겸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들로부터 변한.낙랑.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도 우리 임금께서 겸허하셔서 저
를 사신으로 보내셨으니 오히려 예에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왕이 몹시 화를 내면서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대답했다. 왕이 분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측근에서 말려 돌아가게 허락했
다.('삼국사기' 혁서세조 38년)'

마한왕이 호공에게 화를 낸 것은 이유가 있다. '삼국사기' '혁거세조'는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은 이유에 대해서 "이보다 앞서 중국인들이 진(秦)나
라의 난리*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 등〕를 피해 동으로 온 자가 많았
는데 그 대부분이 마한 동쪽에 자리 잡아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살더니 이때
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미워하여 책망한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혁거세왕이 마한왕에게 사신을 보낸 것은 신라의 일개 국왕의
자격으로 보낸 것이 아님을 시사해주고 있다.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는 이유로 미워했다는 사실은 신라가 곧 진한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신라는 북방에서 갓 이주했지만 우월한 무력을 바탕으로 진한 12개국의
맹주가 되었고, 그 자격으로 마한왕에게 사신을 보낸 것이었다. 위 기사의
중국인 기록은 '후한서 동이열전' '한조'의 "진한(辰韓)은 그 노인들이 스
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라고 했다는 기록과 정확
히 맞아 떨어지는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진한의 맹주가 된 사로국(신라)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변 소국
들을 정복해 나갔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제로섬 게임인 만큼 정복에는 여
러 방법이 동원되었다. 신라의 주변 국가 정복기사는 '삼국유사'의 노례왕
(3대 유리왕)에 대한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건호(建虎) 18년(서기
42)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4대 탈해왕(57-80) 때의 거도(居道)라는 인물이 상대의
허를 찌르는 계책을 쓰는 기사가 실려있다.

'거도는 그의 성이 전해지지 않아 어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가 탈해
이사금을 섬겨 간(干)이 되었을 때 우시산국(于尸山國:현재의 울주)과 거
칠산국(居漆山國:현재의 동래)이 신라 접경에 끼어 있어서 자못 나라의 걱
정이 되었다. 거도가 지방관리가 되어 몰래 그 나라들을 병합할 뜻을 품고
매년 한 번씩 말떼를 장토 들판에 모아놓고 병사들을 시켜 말을 타고 달리
게 하는 것으로 오락을 삼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마숙(馬叔:말 아저씨)
이라고 불렀다. 두 나라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을 늘 보아왔으므로 신라 사
람들의 통상 행위라고 생각해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거도가 불시
에 군사를 일으켜 두 나라를 멸망시켰다.('삼국사기'권 44, 거도(居道) 열
전)'

탈해왕때 신라가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점령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바다에 면한 울주와 동래 지역을 장악했다는 것은 해상교통로를 확보했음
을 뜻하기 때문이다. 신라는 고립된 경북 내륙지역에서 벗어나 주변국들은
물론 중국의 군현들과 교역하기 위한 해상교통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두 나
라를 정복한 것이었다. 이로써 신라는 해상강국 실현에 한걸음 성큼 다가
갔다.

해상교통로 확보로 국력을 비약적으로 신장시킨 신라는 5대 파사왕(80-
112) 때 더욱 맹렬하게 영토를 확장해갔다. 파사왕 재위 23년(서기 102)에
음즙벌국(音汁伐國)을, 25년에 실직곡국(悉直谷國)을 정복한데 이어 27년
에는 압독국, 29년에는 비지국.다벌국.초팔국을 정복했던 것이다. 신라의
정복전은 계속되어 9대 벌휴왕 2년(185)에는 소문국(召文國:의성)을, 11대
조분왕 2년(231)에는 감문국(甘文國:김천)을 정복했고, 12대 첨해왕대(24
7-261)에는 사벌국(沙伐國:상주)을 병합해 경북 전지역을 장악했다.

그런데 신라의 이런 정복전쟁은 고구려, 백제, 말갈 등과 치열하게 맞서
싸우면서 이룩된 성과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서국을 멸망시킨 유
리왕 19년(42)은 고구려 군사가 침범한 해이기도 했다. 백제도 탈해왕 재
위 8년(64), 10년, 14년, 18년, 19년, 20년에 거듭 전쟁을 치렀을 정도로
극도의 긴장상태였다. 여기에 왜인과 가야, 말갈까지 틈만 있으면 신라를
공격했다.

'가야가 남쪽 변경을 노략질했다. 가을 7월에 지마왕(112-134)이 직접
가야를 정벌하려고 보기(步騎:보병과 기병)를 거느리고 황산하를 건너는데
가야군사가 수풀 속에 군사를 매복하고 기다렸다. 왕은 이런 줄도 모르고
곧장 전진하는데 갑자기 복병이 튀어나와 여러 겹으로 둘러쌌다. 왕이 군
사를 지휘해 맹렬히 싸워 포위를 뚫고 물러나왔다. ('삼국사기' 지마이사
금 4년조)'

이런 전투기사는 그리 드물지 않을 정도로 신라는 항상적인 전쟁상태였
다. 신라는 전쟁을 회피하지는 않았지만 친교 또한 중요한 외교수단으로
삼았다. 그런 예를 왜국과의 관계로 살펴보자. 남해왕 11년(14)에 왜인은
병선 100여 척으로 해변의 민가를 노략질했으나, 탈해왕 3년(59)에는 친교
를 맺고 사신을 교환했다. 그러나 친교는 곧 깨져 탈해왕 17년(73)에는 왜
인이 다시 목출도를 침략해 신라의 각간 우오(羽烏)가 맞서 싸우다 전사했
으나 지마이사금 12년(123)에 다시 강화를 체결했다. 이런 관계는 백제와
도 마찬가지여서 대부분 극도의 긴장상태였지만 파사 이사금 26년(105)에
는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한데 이어 지마이사금 14년(125)에는 구
원군을 보내기까지 했다.

'지마이사금 14년 봄 정월에 말갈이 북쪽변경에 대거 몰려와 이민(吏民
)을 죽이고 노략질하더니 가을 7월에 또 대령책(柵)을 습격하고 니하(泥河
)를 넘었다. 왕이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청하니 백제가 장군 다섯 명을
보내어 도왔는데 말갈이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삼국사기' 지마이사금
14년조)'

신라는 이처럼 전쟁과 외교를 적절히 섞어 사용하며 강력한 정복국가로
발돋움했다. 3대 유리왕 때부터 본격적인 정복에 나서 4대 탈해왕 때에는
두 나라, 5대 파사왕 때는 무려 여섯 나라를 정복해 고대국가의 기틀을 세
운데 이어 3세기 중반인 12대 첨해왕 때는 경북 일대 전체를 아우르는 강
력한 고대국가를 완성한 것이다.

*17代 내물왕, 첫 중앙집권군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생생하게 기술된 신라의 팽창과정은 그간 일
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제자들에 의해 부정되어왔다. 이들은 제17대 내물왕
(356-402) 때에야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했다며 그 이전의 400여년 역사
를 부인해왔다. 이들은 심지어 '삼국사기'에 분명히 이사금이라고 기록되
어 있는 내물왕이 최초의 마립간이라고 주장하는 후인의 월권도 서슴지 않
았다.

내물왕 때에 비로소 신라는 중앙집권국가가 되며 그 이전에는 진한의 1
2개 소국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3세기말까지 소국에
불과했던 신라가 내물왕 때 '갑자기' 강국이 된다는 논리야말로 역사의 단
계적 발전과정을 무시하는 비실증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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