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누드로 절규하다, 그의 이름 무세중

  • 입력 2011-03-04   |  발행일 2011-03-04 제36면   |  수정 2011-03-04
"대구는 보수적 같지만 레지스탕스적인 구석 있어, 그건 맘에 들지만…"
"문무왕 안중근 이순신 을지문덕 전태일 민족지킴이
전두환 정권 학살에 항거의 뜻으로 누드 퍼포먼스
요즘 예술가들 철학 부족…유명해지려고 환장이야"
[인터뷰] 누드로 절규하다, 그의 이름 무세중

무세중은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북한산 서쪽 자락의 한 비닐하우스에 아내와 단 둘이서 산다. 노숙인과 다름없지만 표정은 영롱하다. 다들 그 내공을 부러워한다.

올 봄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한다.

가진 돈도 없고 대책도 없다. 하지만 그는 그곳을 세상의 신령한 기운이 모인 '소도(蘇塗)'라 여기고 태연하게 산다. '문화저격수'들과 함께 매달 보름날 '한민족 삼신제'를 푼다. 10년째다.

스스로 제사장으로 여기는 듯 광산 김씨란 고유의 성(姓)을 버리고 '무(巫)' 가로 바꿨다.

남편과 같은 성으로 바꾼 22살 아래 아내 무나미씨.

30여년째 함께 살고있지만 생활에 찌든 기색이라곤 찾아 볼 수 없다. 기품도 흡사 '선녀' 같다.

둘은 자식도 낳지 않고 집도 은행계좌도 모두 없앴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친동생이 현재 조선일보 고문(전 주필)으로 있는 김대중씨란 것이다. 한 배에서 나왔지만 가는 길은 서로 달랐다.

올해 일흔다섯의 그는 스스로 '무당'이라고 말한다.

매일 굿을 먹고 사는 기인, 아니 광인(狂人)이다.

수가 틀리면 그가 누구든 개의치 않고 면전에서 육두문자(肉頭文字)를 날린다. 기가 약한 자는
그의 눈빛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이른바 '무기(巫氣)' 때문이다. 그가 대구에 왔다.

마임이스트 조성진씨가 시내에 차린 씨에터굿에서의 특강 때문이다. 기자도 청강했다.

그는 적홍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긴 머릿결, 강의 중간에 술도 마셨다.

객석에도 권했다. 강의장이 꼭 '고사판'같다. 뒤풀이 전에 종로의 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얘기 때문에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또 수가 틀린 모양이다.

"대구가 간단한 동네가 아니야, 어쩌다가 대구가 오페라와 뮤지컬의 도시가 돼버렸어.

민족예술한다는 자들(대구 민예총 관계자), 다 뭐하는거니. 굿이 중심에 서야 되는 것 아니니. 앞으로는 통일굿을 벌여야 돼." 이어 욕설을 마구 퍼부어댔다. 옆에서 식사를 하던 한 중년 사내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진다.

그게 미안했던지 그가 나갈 때 손님한테 양해의 제스처를 보낸다.



'주변의 나쁜 견해와 습관에 이끌려 그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다. 자신을 존경하지 않으면 도덕도, 질서도, 영속도, 삶을 진척시키는 열정도 없다. 그런 인간은 일정한 형태가 없는 쇠똥처럼 부서진다.'

체코 출신의 소설가 카프카의 말이다.

타계한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못지 않은 한국 전위예술가 1세대로 불리는 무세중(巫世衆·75).

그의 활약상은 비범했지만 세상 평가는 너무나 야속하고 미미했다. 언론은 늘 그를 부담스러워했다. 초점을 벗어난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2007년 '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 50년'이란 그의 평전 같은 묵직한 책이 출간됐다. 그는 해체주의자이고 무정부주의자이며, 원형탐색자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고, 한민족의 핵과 세계정신의 핵을 봉합시키려고 절규했다. 독재, 반문명, 분단, 개발, 파벌, 인간의 이기주의 등과 맞서 싸웠다. 생활이 아니라 '생명'을 사수했다. 그 싸움의 수단은 난장굿 같은 퍼포먼스.

한인·한웅·한검(삼신)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민족 원형을 자신이 창안한 '도극(道克)'으로 뿜어낸다. 그때마다 발가벗었다. 세상은 그의 누드를 호기심의 대상으로 봤을 뿐 발가벗음의 본질과 메시지는 등한시했다.


■ 무세중 일문일답


◆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姓을 버리다

-대구와의 인연은.

"대구에 오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 콤플렉스가 없어지네.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아. 다른 도시에 가면 기가 안 살아. 대구YMCA 전호영 총무(작고)와 연극인 이필동(작고), 마임이스트 조성진, 경북대 독문학과 김창우 교수 등이 나와 배가 맞지. 대구는 보수적인 것 같은데 레지스탕스적인 구석이 분명히 있어. 그게 맘에 들어."


-성은 왜 바꿨나. 소문에 따르면 문중 어른들이 자신의 누드 퍼포먼스를 못마땅하게 지적하는 바람에 문중과 결별하기 위해 성을 확 바꾼 것이라 하는데.

"낭설이다. 나는 장남이다. 9남매 뒷바라지에 고생하시던 아버지가 61년에 돌아가셨어. 나는 장남 역할 제대로 못하고 미친 듯 연극판을 돌아다녔거든. 내가 가는 길에 대해 누가 뭐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원래 본명은 김세중(金世中)이야. 스스로 부질없는 씨족의 성을 버리고 인민 '중(衆)'자로 바꿨어. 일 내려고 작정한 거지 뭐. 무(巫)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 하늘(天)과 땅(地)을 맺는 사람, 춤추는 무(舞), 무위로 존재하는 무(無), 모든 충돌과 맞서려는 무(武)이기도 해."


-50년대 당신의 전국 무전여행기가 신문에 실렸는 걸 봤다.

"서울고 시절에도 '젊은 청년학도에게 고함'이란 글을 쓸 정도로 저항적이었어. 지상의 지식을 다 섭취하기 위해 문학·사상전집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성에 차지 않았지. 58년 성균관대 3학년 때 충청·전라·경상도를 ㄹ 자 형태로 4천리, 59년 경기·강원도를 4천리, 도합 2년간 8천리를 도보로 무전여행했거든. 짠한 깨달음이 오더라구. 우리, 나라, 삶과 죽음, 가난과 무지, 사람과 자연 등에 대해 알게 됐지 뭐."


-그때 당신의 삶의 모토가 생긴 것인가.

"당시에 쓴 일기의 한 구절을 소개할게. '뒤를 돌아보지 말라. 뒤를 충분히 거쳐 왔다면 볼 필요가 없다. 미래가 쳐들어오는데 뒤를 보는 것은 현재의 죽음 때문이다. 돈을 세지 말라. 돈을 세면 앞으로 못간다. 앞을 가리니까. 가진 것이 있으면 나눠라. 나누지 않으면 강제로 나눠지게 되니까.'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무세중 반란 1탄은 뭔가.

"64년부터 '탈춤 찾기'에 나섰어. 당시 연극판은 너무 서구적이었어. 그래서 난 외국서적을 버렸지. 송석하의 조선민속고, 김재철의 조선연극사, 양재연의 고대 연희, 이두현의 한국가면극 등을 탐독하는 한편 양주 별산대놀이의 김성대, 동래 들놀이의 박덕업, 남사당 덧뵈기의 남운용, 봉산탈춤의 이근성 등 한테서 '한국의 원형적 미학'을 배웠어. 10여년간 연구결과를 토대로 69년 10월 명동 서울YMCA 강당에서 '김세중 탈춤사위 종합전수 발표회'를 가졌지. 그때 민속학자 심우성과 함께 민속극회 '남사당', 동아시아 민속을 연구하기 위해 '동아민속예술원'을 창립하고 새로운 민족극을 위해 '극단 민족'까지 동시에 창립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활화산 같던 나날이었지."


-그때는 박정희 군부독재시절이라 요주의 인물로 찍혔을 것 같은데.

"73년부터 덕수궁 뒷마당에서 시리즈 굿판을 벌였는데 당국에 의해 무산됐어. 극단 민족 공연도 금지됐고. 풍물을 들고나온 걸 군인들이 이상하게 봐 정보국 요원들한테 늘 감시당했지. 하지만 난 죽는 게 겁이 안나. 왜 그런 것에 굴하겠어. 75년 11월 '전통과의 충돌'이란 명제를 걸고 국립극장에서 창작발표회를 가졌어. 전통을 박제시키지 말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피와 살로 만들고 싶었거든. 상당수가 나를 '빨갱이'로 몰아가더라. 더 이상 대한민국에 못 있겠더라. 그래서 77년 독일로 갔지."



◆ 나는 무당이다

-당신은 무당인가, 예술가인가.

"예술은 무슨, 난 굿쟁이야. 스무살 즈음, 대관령·진부령 산 속에서 산신령의 계시를 받았어. 난 예술가적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난 기능인이 못돼."


-당신의 철학을 말해달라.

"나는 굿을 하는 민족철학자라고 생각하지. 평생 다섯가지 숙제를 풀며 여기까지 왔어. 가장 먼저 케케묵은 가부장제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싶었거든. 그 다음에는 서양문명, 독재, 이념, 인간의 콤플렉스 순이었어. 그때마다 새로운 공연을 연출했지. 제일 애착이 가는 건 통일아리랑과 통막살(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이야. 82년 독일에서 귀국 뒤 처음 공연한 '反 그리고 통·막·살'은 모르긴 해도 통일을 주제로 한 대표적인 한국전위예술의 전형으로 꼽힐 거라고 본다."

-통일굿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민족의 공생정신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지. 자칫 북한이 중국이 될 수도 있거든. 그렇게 되면 중·미·일의 각축장이 되고 말거야. 통일이 안 되면 우리는 영원히 국제 고아가 될 것이야. 북한이 중국화 되면 우리 역시 중국화 되고, 미국도 손 떼고 말 게 분명해. 공생하기 위해선 통일이 되어야 하지."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개념이 뭔가.

"인간이란 게 뭔가. 결국 몸과 마음과 얼로 구성돼 있는 게 아니냐. 그래서 세상의 모든 근원적 사상은 대충 삼중적 구조를 갖고 있지. '천지인(天地人)'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 가장 잘 맞는 말이 바로 '아리랑'이야. 내가 강의할 때 이 말의 의미부터 알려주지. '아'는 신을 부르는 소리이며 신과 교감하는 소리야. 이것은 하늘과 아버지, 태양, 밝음 등과 상응한다고 보면 돼. 입을 동그랗게 벌이고 아~ 이렇게 소리를 내면 신묘한 기분이 들어. '리'는 땅, 어머니, 이성, 맑음 등을 의미하고, '랑'은 사람, 아들, 넓음 등을 가리키지. 이 세 흐름을 매듭지어주는 인자가 바로 '한(恨)'이라고 해."

◆ 최초의 누드퍼포먼스

-제정일치 시대의 제사장들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알았을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런 역할을 하는 자들이 없는 것 같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놀이, 인간과 신의 관계는 굿으로 표현할 수 있어. 굿을 하는 무당은 사실 우리의 어머니라고 보면 돼. 대한민국 시내 중심부에 굿당이 서야하는 것은 당연하지."

-최초의 누드 퍼포먼스는 언제했나.

"전두환 군부정권 시절이었어. 광주사태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었지. 삼신을 모신다는 사람이 그런 엄청난 학살에 대해 구체적으로 항거하지 못한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어. 그래서 일을 저지른거야. 관객을 자청한 취재기자와 함께 겨울의 오대산 산정으로 갔어. 극단 단원 20명이 합의를 해 옷을 벗고 찬물에 몸을 담갔지. 집단누드시위였다고나 할까. "

-요즘 예술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철학이 너무 부족해. 공부도 너무 안해. 모두 유명해지려고 환장이지. 돈을 벌려고 하는 짓거리를 예술이라 할 수 있겠나. 조국의 현실을 보지 않으려 하고 오직 개인의 성공에만 매몰된 예술이야. 그래서 그들을 향해 욕하는 거지."

-남은 과제는 뭔가.

"얼마전 내 예술 50년을 정리한 책이 나왔어. 모두 10권을 내야 성에 차는데 2003년 간이식 수술 때문에 몇 년 더 살 수 있을 지 모르겠네. 지금 제3권을 준비중에 있지. 50년간 극에서 선보인 100여종의 각종 제문을 엮은 것이야. 내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아리랑박물관이라도 생겼으면 좋겠는데, 이런 판국에 누가 그런 걸 지어줄까. 정부는 툭하면 수천억, 수조 운운하는데…. 거참."

-제문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가나.

"모두 감사해야 할 대상에 대한 글이지. 천지신명, 오늘의 우리의 몸과 맘, 얼을 있게 해준 한인·한웅·한검님, 그리고 역사 속의 위인 5명이야. 동으로 문무대왕, 서로 안중근, 남으로 이순신, 북으로 을지문덕, 중앙에는 전태일. 이들은 우리의 역사의 한 시기, 그리고 한반도의 전역을 고루 대변하고 있어 난 '5대 민족지킴이'로 불러."

-동생이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이라서 행동하는 데 제약은 없는가.

"동생은 좀 보수적이지. 그 때문에 크게 싸운 적도 있어. 그때부터 우린 깊은 얘기를 하지 않아. 나도 동생 고집을 못 꺾고 동생도 내 고집을 꺾을 수 없지. 허허."

바쁜 장터의 아줌마들, 그들에게 공기보다 돈이 더 피부에 와 닿듯, 무세중의 삶도 어쩜 돈처럼 구체적이지 않고 공기처럼 너무 광활하고 추상적이라서 일반인들에게는 좀 아득하고 멀어져 보인다. 그래도 그는 자기가 공기라고 폼내지 않기에 더 웅혼한 길을 갈 수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그와 아내 무나미를 보면 비틀스의 멤버였던 존 레넌과 일본인 아내 오노 요코가 생각난다. 그가 인터뷰 말미에 뜬금없이 신묘년 영남일보 사옥 앞에서 굿판을 한번 벌여주고 싶다고 했다. 기자는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냥 웃기만 했다.


◆ 무세중은…탈춤 첫 정리·소개…통일 주제로 한 '막걸리 살풀이' 유명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 불문학과와 중앙대 대학원 연극학과 졸업.

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로서 50년대부터 대학가의 문화였던 탈춤을 처음으로 정리해 소개했다. 69년 서울 YMCA강당에서 공연한 '김세중 탈춤사위 종합전수 발표회'을 통해 세간에 묻혀있던 '남사당'을 공론화시켰다.

한국에서의 전위예술공연은 물론, 독일과 미국 체류를 통해 한국전통전위예술과 서구전위예술의 접목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등 전위예술 공연만해도 500여 회 넘는다. 특히 77년 독일에서 발표된 '제3세계 연극론(세계 자유 연극제 국제 심포지엄)'은 서구 연극인들에게조차 획기적인 논문으로 기록된다.

당국의 감시 때문에 77년 독일로 갔다. 82년 귀국 후 처음 공연한 '反 그리고 통·막·살 (통일을 위한 막걸이 살풀이)'은 통일을 주제로 한 대표적인 한국전위예술의 전형으로 꼽힌다.

2007년 그의 50년 예술적 삶을 정리한 '무세중 전위예술 충돌 50년'(20%커뮤니케이션 간)이 출간됐다. 84년 '무세중 전위극단'을 창단하고 현재 대동전위극회 대표.

[인터뷰] 누드로 절규하다, 그의 이름 무세중
▲무세중씨가 자신의 전위예술 50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한민족 삼신 마당굿' 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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