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개청 100년, 1914~2014 칠곡 .11] 박해를 이기고 지켜낸 신앙의 터 ‘신나무골 성지’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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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수정 2014-11-21  |  발행일 2014-09-26 제면
“나는 죽어도 성교회를 믿겠소” 작두날 앞에서도 당당했던 그들”

‘왜관개청 100년-1914~2014 칠곡’은 칠곡군의 군청 소재지가 왜관으로 옮겨 개청한 1914년부터 100년 동안, 칠곡의 주요 역사와 인물을 다룬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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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이 엘리사벳의 묘소. 이선이 엘리사벳은 1860년 경신박해 때 신나무골에 살던 배정모의 부인으로, 박해를 피해 한티에 숨어지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당시 16세 된 큰아들과 순교했다. 순교자 이선이의 묘는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행사 때 한티에서 신나무골로 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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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천주교회 첫 본당터. 신나무골 초기 신자인 이이전의 집이었는데, 대구 첫 본당 신부로 임명된 김보록 신부가 이곳에서 머물며 대구교회를 설립하고,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을 사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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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천주교 첫 본당 터에 들어서면 김보록 신부 사제관, 명상의 집, 그리고 김보록 신부 흉상 등을 볼 수 있다. 사제관은 김보록 신부가 거처했던 곳으로, 지금은 신나무골 성지와 관련된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 스토리 브리핑

신나무골 성지는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에 있다.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모였던 신자촌으로 1815년(순조 15) 을해박해 때 형성되었다. 1831년 조선교구 창설에 뒤이어, 1837년부터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샤스탕 신부가 신나무골에 머물면서 한반도 남쪽 지역을 맡아 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이후 1973년 성지 개발 기금을 모금하면서 시작된 신나무골 성역화는 77년 제1차 사업을 완수하고 영남 지방의 ‘천주교회선교요람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84년,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맞아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주선으로 한티로 피란 가서 순교 당한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소를 신나무골로 이장하였다. 또한 복원된 본당 터에는 김보록 신부 당시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 명상의 집, 김보록 신부의 흉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학당은 2004년 폭우로 붕괴되었다. 연중 천주교 신자들이 순례 행사로 순교 정신을 기리고 있다.

#1. 신자들 나무 아래 움막 짓고 살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수많은 움막들이 어깨를 나란히 두고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움막들만큼이나 많은 설움과 신념이 촘촘하게 얽혀 있었다. 고향을 떠난 설움과 신앙에 대한 신념 말이다. 바야흐로 핍박과 순교의 때였다. 나라의 길과 신앙의 길이 달라서 벌어진 일이었다. 틀린 것은 없었고 다만 다를 뿐이었음에도 다름은 충돌을 낳았고, 충돌은 약자에 대한 박해를 낳았다.

1801년(순조 1) 일어났던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종결된 뒤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몰아 신자들을 박해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신분이 노출되었으니 살아남았다고 해서 살던 곳에 더 이상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신자들은 산골로 피신하여 교인촌을 이루어 생계를 유지하여 나갔다.

그러던 1814년, 전국에 혹심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고난이 형용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때 교인들의 재산을 노린 백성들과 지방관들이 중앙의 지시도 없이 임의대로 천주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 해인 1815년(순조 15)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벌어진 을해박해(乙亥迫害)이다. 이 박해로 당시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일월산 중의 우련발과 곧은정에 살던 신자들 2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 중 대부분의 신자들은 배교(背敎)·석방되거나 옥사했고, 겨우 33명만이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체포된 신자들의 가족과 다른 곳 신자들이 임진왜란 때의 피란지이기도 했던 신나무골로 숨어들면서 처음으로 신자촌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서 신나무골이 ‘신나무골’로 불리게 된 데 대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신자들이 나무 아래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마을 이름조차 ‘신나무골’로 지어졌다는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1836년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나와서 포교 활동을 할 때 한반도 남쪽 지방을 맡은 샤스탕 신부가 순회 선교를 하였는데, 이때 나무 밑에 움막을 짓고 얼마간 살았기에 ‘신부님이 나무 밑에서 움막을 짓고 피란을 했다’고 하여 ‘신나무골’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다. 둘 중 어느 것인들 어떠랴. 이후 샤스탕 신부는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당고개에서 순교했다.

대구를 지척에 둠으로써 많은 선교사들이 대구 진출 전초기지로 삼았던 신나무골은 최양업, 다블뤼, 리텔 신부 등이 사목 활동을 했던 곳이다. 1831년 조선교구 창설 후, 1837년부터는 샤스탕 신부가 신나무골과 언양 등지에 머물면서 선교를 하기 시작했고, 샤스탕 신부의 순교 후에는 다블뤼 신부가, 1849년부터 1861년 6월까지 12년간은 최양업 신부가 신나무골을 방문하여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후 최양업 신부가 과로로 쓰러지고 나서는 다시 다블뤼 신부가 신나무골 지역을 맡았다.

그러던 중 대규모 박해가 일어났다. 바로 1866년(고종 3)부터 1871년까지 대원군에 의해 자행되었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병인박해(丙寅迫害)였다. 이로 인하여 신나무골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점차 박해가 잦아들면서 신자들은 다시 모여들었고, 1882년부터는 김보록(로베르) 바오로 신부가 순회 사목을 하기 시작했다. 189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이 되면서는 아예 신나무골을 거점으로 삼아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 후 30여 년에 걸친 김보록 신부의 사목 활동은 지역 복음이 확고히 자리 잡는 데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2. 아들과 순교한 엘리사벳 유해 묻힌 곳

계단 여덟 개를 오른 후 작은 마당을 지나면서 한소끔 숨을 쉬고 다시 열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아주 커다란 묘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1860년(철종 11) 경신박해(庚申迫害) 당시 큰아들과 함께 순교한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해가 묻혀있는 곳이다. 그리고 묘 주위로는 산기슭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반원으로 둘러싸며 생나무를 깎아 만든 십사처(十四處)가 조성되어 있다. 십사처란 예수 십자 행로의 열네 자리를 말한다.

작두에 목을 놓은 이선이는 담대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 남편은 이미 배교하여 목숨을 건졌다. 너는 어찌 하겠느냐?”

이선이의 남편인 성산배씨(星山裵氏) 배정모는 원래 성주가 고향이었으나 칠곡으로 옮겨 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으나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하지만 박해가 그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아내 이선이 엘리사벳과 세 아이를 데리고 신나무골로 피해 들어갔다가 결국 한티까지 옮겨가 숨었는데, 그만 그곳에서 포졸들에게 붙잡혀버린 것이다. 그는 신앙과 목숨 중에서 목숨을 택했다. 하지만 아내는 아니었다.

“나는 죽어도 성교회를 믿겠소.”

“죽고 싶은 게 그리도 원이라면 흔쾌히 죽여주마.”

작두가 내려갔다. 이선이 엘리사벳은 그렇게 순교했다. 장남 배 스테파노와 함께였다.

이후 배교하고 풀려났던 배정모는 아내와 자식을 한꺼번에 잃은 뼈저린 아픔 속에 시신을 그 자리에 묻었고, 이후 다시 선산이 있는 칠곡의 안양동으로 아내의 시신만 이장했다가 다시 칠곡으로 옮겼다. 그런데 1984년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신나무골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이곳 신나무골로 그 유해를 이장해 온 것이다.

#3. 박해를 피해 일군 첫 본당 터

혈통에 본디가 없어 보이는 개 두 마리가 까슬까슬한 가을 햇살 아래 까무룩 졸고 있었다. 순례 중인 사람들이 꾸준히 드나들었지만, 개들은 성지를 지키는 동물답게 순하게 길들여지고 있었다. 무례하게 짖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꼬리를 마구 흔들지도 않는 개들을 뒤로하고 작은 나무 대문을 들어서면 아담하니 본당 터가 펼쳐진다. 정식 명칭은 신나무골 대구천주교 첫 본당 터. 이곳은 김보록 신부 사제관, 명상의 집, 그리고 김보록 신부 흉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은 원래 이이전 안드레아의 집이었다. 이이전은 원래 달성군 부곡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나 고을의 박해를 받아서 1862년 신나무골로 이사를 왔다고 전해진다.

사제관은 김보록 신부가 대구 교구 첫 본당 신부로 발령받고 약 2년간 이곳에서 거처하였고, 지금은 신나무골 성지와 관련된 자료들의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신나무골 신자들이 이곳을 관리하고, 방문객에게 문을 열어주고 있다. 사제관의 한쪽 방에 들어서면 ‘죽어도 성교회(聖敎會)를 믿겠소’라고 쓴 이선이 엘리사벳의 믿음의 글을 만날 수 있다.

김보록 신부의 흉상은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로서 1877년 한국에 입국하여 전교 활동을 하며 신학생을 모아 가르치던 그를 기리기 위함이다. 김 신부는 당시 블랑 주교에게 보낸 사목보고서에서 ‘경상도 신자들은 일 년에 한 번씩 (순회)선교사가 그들을 방문하고는 다시 떠나가기 때문에 버림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1886년 4월에는 마침내 경상도 첫 사제관을 신나무골에 두었다’고 적고 있는데, 여기에 쓴 사제관이 바로 신나무골 성지의 사제관이다. 그리고 사제관 오른쪽의 명상의 집은 신나무골에서 피정을 원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된 장소로, 20~25명 정도의 인원이 숙박을 할 수 있다.

#4. 신학문의 배움터, 신나무골 학당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들이 바닥을 점점이 찍고 있었다. 계절은 그렇게 또 한 번 지나가는데, 그늘 한 점 없이 텅 빈 서당 터는 어찌나 무심해 보이는지!

연화리에 있어 연화서당이라 불리기도 하는 신나무골 학당은 1920년 신동초등학교가 세워지기 전까지 신학문과 구학문 그리고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던 배움과 복음전파의 전당이었다. 교육 사업에 큰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영남 지방의 복음화에 헌신했던 김보록 신부가 1833년 설립했다. 1855년에 충북 제천(현재의 봉양면 구학리)에 세워진 배론 신학교를 제외한다면, 천주교 내에서는 가장 일찍 신학문을 가르쳤던 신교육 기관이었다. 신나무골 학당은 김보록 신부가 세웠던 당시 그 모습 그대로 흙집으로 복원되었으나 10년 전의 수해와 폭우로 다시 훼손되어 무너져버렸다. 짧은 안내글이 안쓰럽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이곳은 신학문을 가르치던 신나무골 학당으로 2004년 9월 폭우로 인하여 붕괴되었습니다. 이른 시일 안에 복구될 수 있도록 교우 여러분의 많은 기도를 부탁합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 기획 : 칠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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