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구수석 은퇴목사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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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04  |  수정 2017-01-04 08:28  |  발행일 2017-01-04 제29면
“정조에게 능지처사당한 6대祖 묘 230년만에 찾았죠”
20170104
구수석 은퇴목사가 구선복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미소짓고 있다.

6대祖는 정조의 정치적 희생양
영화‘역린’서 왕위 옹립役 등장
능지처사형으로 다리 뼈만 남아
“왜 역적이 됐을까” 사료 등 찾아
누명 씌워…반정사건도 조작돼
할아버지 명예 회복되길 바랄뿐


영화 ‘사도’와 ‘역린’은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 이산(정조)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2015년과 2014년에 개봉해 각각 600여만명과 400여만명의 관객을 돌파한 이 두 영화에 훈련대장 구선복(1718~86)이 등장한다. 구선복(송영창 분)은 특히 역린에서 정조를 왕위에 옹립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로 나온다. 하지만 후일 정조는 그를 반정으로 몰아 처형한다.

구수석 은퇴목사(83)는 지난해 12월3일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산373-6에서 자신의 6대조인 구선복 장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 발굴했다.

“230년 만에 조상의 묘소를 찾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정조에게 능지처사형을 당했는데 어떻게 봉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만 정말 기적 같은 일입니다.”

구 목사는 최근 영남일보를 방문해 감격에 겨워 말을 이어갔다.

“할아버지의 산소는 수원최씨 종중산에 있었습니다. 최씨 문중에 선대로부터 ‘이 무덤은 구선복이란 장군의 무덤인데 우리가 돌봐야 한다’고 전해져왔다고 해요. 종중산을 처분해야 할 시점에 구선복이 누구인지 찾다 제가 쓴 책(정조시대 훈련대장 구선복-옥사·사료근거)을 보고 출판사에 전화를 해 저와 연락이 닿은 것입니다.”

구 장군의 시신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거의 흙으로 변해 있었다.

“신체 중 상반신은 없고 다리뼈만 남아있었습니다. 능지처사의 흔적이겠지요. 유골과 널의 일부를 정성스레 수습해 종중산(능성구씨 도원수파 호양공 문중)으로 이장했습니다.”

구 목사가 구 장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20년전으로 올라간다. 서울신학대 신학과를 졸업한 그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거쳐 목사 안수를 받고 계명대 동산의료원에서 원목으로 근무했다. 이후 부산 성애교회를 비롯해 경남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 우연히 가승(家乘·범위가 좁은 족보의 일종)을 접한 뒤 구선복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선친으로부터 ‘우리 집안은 역적의 후손’이란 말을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역사 비전공자였지만 ‘왜 할아버지가 역적이 됐을까’ 하는 궁금증에 각종 당쟁사, 전쟁사, 왕조사 등을 통독하며 열심히 사료를 파고들었습니다. 한편으론 규장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민족문화추진위원회 등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지요.”

사서에 의하면 구선복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 담을 추대해 반정을 하려다 발각돼 양 아들 이겸, 조카 명겸과 함께 각각 능지처사, 효시, 참수당했다고 나온다.

정조실록에는 정조가 “역적 구선복은 홍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 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들이 많아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해 법을 적용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구 목사는 구선복이 정치적으로 정조에게 토사구팽당했다고 주장한다. 정조가 억울하게 역적의 누명을 씌워 속전속결로 정적을 제거했다는 것이다.

“정조실록에 구선복에 대한 추국(재판)기록이 있는데, 연구자들은 재판기록보다 판결문에만 의지해 구선복을 역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모년잡기, 한국계행보, 한사경 같은 데선 구선복이 사도세자의 형틀이었던 뒤주를 제공하고 사도세자를 조롱했다고 나와있는데, 영조실록에는 홍봉한이 뒤주를 제공했다고 나옵니다.”

그는 구선복에 대한 추국도 엉터리로 진행됐으며, 반정사건도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구선복을 음모에 빠뜨린 이는 바로 정조와 정순대비, 송낙휴, 조규진 등입니다. 할아버지에 대한 신문(訊問)과 공초(供草·죄인 신문기록서), 결안이 다 달라요. 또한 사건과 관련된 결정적인 증인을 살해했으며 대질신문도 하지 않았어요. 오죽했으면 할아버지께서 ‘비록 역모를 하고 싶더라도 혼자서는 할 수 없을 것이니, 동모한 사람이 있을 경우 대질시켜 주었으면 한다. 이번 일도 필시 어떤 사람이 저를 죽이려고 이렇게까지 꾸민 일일 것이다’고 고변했다고 나와있지요.”

구 목사에 따르면 당시 정조는 임오화변에 가담했던 정적을 거의 다 제거했고 규장각을 설치해 친위인재를 양성하고 있었으며 장용위 설치를 앞두고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선 군권의 8할을 쥔 구선복을 제거해야만 했기에 정치적 희생물로 삼았다는 것이다.

구 목사는 구선복을 ‘역적 중의 역적’으로 내몬 교수와 연구자를 찾아가 사료를 제시하며 항의했지만 만나주지 않았다고 했다. TV드라마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도 구선복을 악인으로 내몰아 방송국을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교수는 그의 연구성과를 격려하기도 했다.

“이영춘 전 국사편찬위원이자 조선시대사학회 회장은 ‘총명한 영재를 만나면 선조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을 것이고 목사님의 책이 초석이 될 것’이라고 했어요. 이제라도 할아버지의 유골을 찾아 정말 다행입니다. 능지처사를 당한 인물의 무덤을 발견한 적이 있나요. 구족이 멸하고 다 버려지지 않았습니까.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그날이 반드시 오길 기원합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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