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寺미학 .14] 산사 꽃무릇...꽃 사그라든 후 잎 돋아나…이루지 못한 사랑을 닮았네

  • 김봉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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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03 07:43  |  수정 2021-07-06 10:28  |  발행일 2019-10-03 제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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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선운사 부근 산비탈에 피어난 꽃무릇. 꽃무릇은 한 송이로 보이지만 보통 여섯 개의 꽃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여섯 개의 꽃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불교 실천덕목인 육바라밀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여름의 산사(山寺) 곳곳을 붉게 수놓던 배롱나무 꽃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할 때, 산사 주변은 또 다른 붉은 색으로 물든다. 꽃무릇이 그렇게 만든다. 땅 위로 꽃대만 쑥 내민 뒤 그 끝에 커다란 붉은 꽃을 피우는 독특한 식물이다.

9월 중순경이 되면 이 꽃무릇으로 붉게 물드는 산사가 적지 않다. 특히 전라도 서해안 쪽에 있는 사찰들이 그렇다. 꽃무릇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사찰 주변은 보름 정도 선경 같은 별천지로 변한다. 그 중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김제 금산사 등이 유명하다.

9월 중순 꽃 피워 보름간 별천지
선운사·불갑사·용천사 3大 명소

꽃대 끝엔 보통 여섯개 꽃봉오리
대승보살 덕목 ‘육바라밀’ 상징

꽃·뿌리 이용해 그린 탱화·단청
방부제 성분 덕분에 좀 슬지 않아
사찰주변 많이 심겨 군락지 이뤄


◆고창 선운사 꽃무릇

지난 9월19일 고창 선운사를 다녀왔다. 선운사가 가까워지자 도로 변에도 심어놓은 꽃무릇이 꽃을 피우고 있어, 꽃무릇 세상으로 들어섬을 알리는 것 같았다. 매표소와 일주문을 지나니 길옆 숲속 곳곳에 꽃무릇 천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직 꽃을 피우지 않고 꽃대만 올라와 있는 것이 대부분인 곳도 있고, 꽃을 한창 피우고 있는 곳도 있었다. 꽃을 거의 피우지 않은, 꽃봉오리를 달고 있는 연초록 꽃대가 수없이 많이 올라와 숲속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모습도 색다른 장관이었다. 초봄 고사리 밭에 고사리가 한창 올라오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선운사 앞을 흐르는 개울인 도솔천 옆 숲속의 꽃무릇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특히 그 꽃무릇들이 개울물에 비친 모습은 각별한 풍광을 선사하고 있었다. 무리 지어 핀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꽃 이름처럼 무리를 지어 핀 꽃도 좋지만, 물가에 한두 개가 외롭게 핀 모습도 아름다웠다. 대웅보전과 영산전 뒤의 동백나무 숲속 곳곳에도 외로운 꽃무릇이 보이고, 선운사 앞의 녹차밭 주변에도 꽃무릇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돌아나와 도솔천을 따라 내려오다 일주문에 이르기 전 오른쪽으로 도솔천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니, 왼쪽의 길옆 산비탈을 따라 한창 꽃을 피우고 있는 꽃무릇 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크고 작은 단풍나무가 주종을 이르고 있는 숲속을 꽃무릇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며칠 후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풍경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꽃무릇 군락지는 이 선운사를 비롯해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가 가장 유명하다. 선운사 꽃무릇은 사찰 주변 숲속 곳곳에 자연스럽게 피어있는, 야생에 가까운 모습이어서 정성들여 가꾼 정원 같은 불갑사 꽃무릇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이들 산사 일대에서는 해마다 꽃무릇이 한창일 때 축제가 열린다. 올해 선운사는 9월21일에 꽃무릇시화전, 산사음악회 등이 열린 제12회 선운문화제를 개최했다. 영광군은 불갑사 관광지구 일원에서 9월18일부터 24일까지 ‘상사화, 천년사랑을 품다’를 주제로 제19회 불갑산 상사화 축제를 열었다. 불갑산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꽃무릇 군락지를 자랑한다.

함평군(해보면)은 9월21~22일 용천사 앞 꽃무릇공원 일대에서 제20회 함평 꽃무릇 큰잔치를 펼쳤다. 40만 평이 넘는 땅에 조성된 꽃무릇공원에는 해마다 꽃무릇이 군락을 이뤄 피어나 장관을 연출한다. 용천사 진입 도로 등에도 꽃무릇길이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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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금산사 미륵전 뒤뜰의 꽃무릇.


◆사찰과 꽃무릇

꽃무릇은 요즘 도심의 도로 화단이나 공원 등에도 많이 심기고 있으나, 전통적으로 사찰 주변에 그 군락지가 많았다.

꽃무릇은 9월 중순경에 알뿌리에서 30~50㎝ 길이의 꽃대가 자라나 여러 송이(4~6개)가 우산 모양의 큰 꽃으로 피어난다. 꽃은 붉게 피며, 한 송이는 6장의 꽃잎을 가지고 있다. 꽃잎은 뒤로 말리며 가장자리는 주름이 잡힌다. 6개의 수술은 꽃잎보다 훨씬 길어 꽃 밖으로 길게 뻗어 나온다. 꽃은 보름 정도 유지되다가 시든 후, 11월 초순경이면 꽃대가 사그라져 없어진다. 열매를 맺지 않으며, 12월 중순경부터 짙은 녹색 잎이 올라오면서 초록빛으로 주변을 물들이며 겨울 산야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꽃대만 미끈하게 뻗어 올라 고결함을 보여준 뒤 곧 화사한 모양의 꽃을 피운 후 사라지고 잎이 돋아나는, 독특한 생리의 꽃무릇은 ‘붉은 상사화(相思花)’로도 불린다.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花葉不相見) 생리로 인해 서로 끝없이 생각만 해야 하는(相思),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상징하는 꽃인 상사화로 불리게 된 것이다. 서로를 좋아하지만 이룰 수 없는 애절한 사랑, 무한히 그리워하지만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을 상징하는 꽃으로 인식되고 있다.

꽃무릇은 석산(石蒜)·독산(獨蒜)이라고도 하며, 피안화(彼岸花)로도 불린다. 꽃무릇과 비슷한 상사화는 봄에 잎이 나서 6~7월에 말라 없어지고, 8~9월에 연분홍이나 노랑색, 흰색 등의 꽃이 핀다.

사찰 주변에 꽃무릇이 많은 것과 관련해 회자되어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산사의 젊은 스님이 속세의 아리따운 처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 짝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스님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고, 그 스님의 무덤에 붉은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반대로 어떤 처녀가 수행하는 어느 스님을 사모하였지만 그 사랑을 전하지 못하고 시들시들 앓다가 눈을 감고 말았는데, 어느 날 그 스님 방 앞에 이름 모를 붉은 꽃이 피어났고, 사람들은 상사병으로 죽은 처녀의 넋이 꽃이 된 것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사찰 주변에 꽃무릇이 많은 현실적 이유는 이 꽃무릇에 있는 약성 때문으로 설명된다. 뿌리로 즙을 내고 꽃으로 물감을 만들어 탱화나 단청을 할 때 사용하면 방부제 성분 덕분에 좀이 슬지 않고 잘 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단청을 하고 탱화를 그리는 절집 주변에 많이 심었고, 이것이 번져서 군락을 이뤘다는 것이다.

독특한 생리와 특징을 지닌 꽃무릇은 여러 가지 불교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불교계에서는 꽃무릇을 피안화(彼岸花)라고도 부르는데, 불교에서 해탈에 이르는 것을 피안이라고 한다. 미혹과 번뇌의 세계에서 생사유전(生死流轉)하는 인간의 세계를 차안(此岸)이라 부르고, 이런 상태를 벗어난 깨달음(涅槃)의 세계를 피안이라 한다.

꽃무릇이 잎이 무성하게 나 있는 상태는 번뇌망상이 끊이지 않는 차안의 세계이고, 꽃대만 올라와 꽃이 핀 상태는 해탈열반의 세계인 피안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사찰 주변에 많은 꽃무릇은 사람들에게 열심히 수행, 번뇌와 집착으로 인한 괴로움을 벗어나서 열반의 세계에 살 수 있도록 하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피안화는 대충 보면 한 꽃대에서 한 송이 꽃이 피는 것으로 보이나, 자세히 보면 꽃대 끝에 보통 여섯 개의 꽃봉오리가 나와 피어남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여섯 개의 꽃은 대승보살의 실천수행 덕목인 육바라밀(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이 여섯 개의 꽃이 모여 한 송이의 아름다운 피안화를 이루듯이, 육바라밀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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