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러시아 최초 동양인 마에스트로’ 지휘자 노태철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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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08   |  발행일 2019-11-08 제35면   |  수정 2019-11-08
“열정적으로 보이는 한국인 행복지수 하위권…지휘로 행복한 세상 만들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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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국립교향악단도 이끌며 ‘러시아 최초의 동양인 마에스트로’란 칭호가 따라다니는 러시아 야쿠티아공화국 국립음악원 부총장 겸 오페라극장 지휘자 노태철씨가 한·러 수교 30주년 업무 협의차 대구를 찾아 위클로포유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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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티아공화국 국립 오페라극장 단원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노태철 지휘자.

지휘자 노태철(58).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러시아 최초의 동양인 마에스트로’란 칭호가 따라 다닌다. 모스크바 국립교향악단도 이끌었고 현재 러시아 야쿠티아공화국 국립음악원 부총장 겸 오페라극장 지휘자로 있으니 그럴 만하다.

대구와의 인연도 깊다. 지난 6월23일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모스크바국립교향악단을 데리고 와서 <주>교촌 후원으로 나눔초청공연을 했다. 또한 대구문화재단이 기획한 ‘왈츠가 흐르는 대구’ 프로그램을 리더하기도 했는데 이 때 대구스트링스와 함께 동성로, 대구은행 본점 앞, 두류공원 야외공연장 등 20군데 거리에서 오묘한 왈츠의 세계를 선보였다. 대구시향, 뉴필하모니오케스트라 등과도 호흡을 맞췄다. 지난 1월에는 달서구 웃는얼굴아트센터 초대로 블라디보스토크 필하모니오케스트라와 신년음악회를 선보였다.

현재까지 900여회 지휘 기회를 가졌다. 세계 150개의 오케스트라와 연주를 했다. 거친 공연장만 300여개. 지난해 11월을 그는 결코 잊을 수 없다. 8명 심사위원들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최종적으로 발표하는 러시아 야쿠티아공화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에프게니 미하일로프(초대 대통령) 예술훈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2016년부터 야쿠티아국립음악원 부총장으로 부임한 그는 백야음악축제와 유라시아 음악축제의 총감독을 맡아서 성공적으로 축제를 잘 마쳤으며 야쿠티아오페라극장과 예술단들과 함께 러시아와 한국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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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노태철 지휘자가 받은 러시아 야쿠티아공화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에프게니 미하일로프 예술 훈장.

러 국립음악원 부총장·오페라극장 지휘자
야쿠티아공화국 최고 권위의 예술 훈장
세계 150개 오케스트라·900여회 지휘
대구에서도 많은 공연 기회, 인연 깊어

20代후반 유학…유럽은 오직 실기 위주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생활고 겪기도

지휘는 폼이아닌 진심담은 음악 그 자체
시대 변화, 티켓파워 자질도 무시 못해
법·시스템 매여있는 전국 시립교향악단
역량있는 음악인 자유롭지 못해 아쉬움



한·러수교 30주년 업무 협의차 대구를 잠시 찾은 그를 만나 인터뷰를 했다.

▶대구에 자주 오는가.

“이번에 한·러수교 30주년 업무 협의 건과 함께 평소 좋지 않은 디스크를 치료하기 위해 대구에 잠시 들렀다. 아직 몸이 성치 않아 등산용 스틱을 쥐고 보행한다. 나의 무급휴가는 연간 56일이다. 대다수 생활은 학교 사택에서 보낸다.”

▶지휘자 생활은 풍족한가.

“지휘자의 삶이라?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실은 더 없이 곤궁하다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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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열린 교촌 후원의 모스크바국립교향악단 초청 나눔공연 포스터.

야 된다. 내가 유럽을 넘어 러시아권 유수의 지휘자로 활동하니 다들 내가 구름마차를 타고 다니는 줄 착각한다. 지난 시절 차비가 없어 밖에 나가지도 못한 적도 있다.

▶대학에서 어느 정도 월급을 받는가.

“300만원 남짓이다. 월급은 한국의 5분의 1 수준이다. 러시아 음대 교수들 월급도 상당히 낮다. 2000년대 초까지 100달러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런 교수가 뉴욕 무대에 서면 10만달러를 받는다. 하지만 미국의 열정은 다분히 자본적이고 러시아의 열정은 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가 공산주의란 산을 넘어 왔는데 그럼에도 예술이 독보적으로 강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공산주의가 무너졌다고 하지만 구 소련의 공산주의가 남긴 예술적 자양분은 러시아에 그대로 삽입된다. 러시아는 공산주의 덕분에 예술이 상향 평준화된다. 중앙과 지방의 차별이 없었다. 되레 시골이 더 절정의 음악적 기회를 받을 수 있었다. 모스크바의 유능한 음대생이라도 졸업하면 수도에 남지 못했다. 정책적으로 시베리아 등지로 의무적으로 파견했다. 외지로 갈수록 월급·연금·수당을 많이 주었다.”

▶어떻게 음악의 길로 들어서게 됐는가.

“난 부산공고 전기과 출신이다. 운동에 관심이 많아 태권도, 킥복싱 등을 했다. 하지만 네 번의 대학시험에 모두 낙방해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졌다. 그런 내가 지금 자리에 왔다는 건 나도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신의 가호가 있었나 싶다. 재수하던 시절 우연히 TV를 통해 본 한 지휘자의 웅장한 모습에 매료됐다. 그날로 내 삶의 노정도 분명해진다. 나름 조금의 피아노 실력, 기타학원장 경력 등을 앞세워 동아대 작곡과에 들어간다. 당시만 해도 지휘과가 없어서 작곡과에 들어간 것이다.”

▶동아대 출신이 어떻게 러시아권 지휘자가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난 동아대에서 나름 수재였다. 수석 자릴 뺏기지 않았다. 29세란 상당히 늦은 나이에 전세금을 빼내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난다. 유학을 가보니 이론 같은 게 다 필요없더라. 피아노와 청음 능력만 봤다. 어학이 급선무였다. 한국인 없는 시골의 어학전문학교에 입교한다. 하루 9시간씩 독일어를 공부했다. 나름 동아대 전설이었지만 현지에 가보니 나는 조족지혈이었다. 초라한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암담했다. 이래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은 너무 이론 위주였다. 하지만 유럽은 오직 실기 우선이었다. 그 간극도 줄여야만 했다. 또 복병이 있었다. 나이였다. 대다수 학교는 내 나이 갖고는 입학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

▶보통 그런 순간 운명의 신이 찾아올 것 같은데.

“맞다. 마스트클래스 청강 때 인연이 된 독일 뷔르츠부르그 국립음대 헤르만 데히얀트 교수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가 프랑크프루트까지 오라고 했다. 지휘는 그한테, 피아노는 사모님한테 배웠다. 독일 부부는 날 자식처럼 배려해 주었다. 레슨비도 한푼 받지 않았다. 자기 집에 재워주고 도시락까지 챙겨주었다. 난 그게 운명이라 본다.”

▶생애 첫 지휘는 어땠는가.

“1994년 7월17일 독일 호프심포니를 지휘하게 됐다. 나의 데뷔 무대였다. 지도 교수가 230㎞ 떨어진 거기로 제자의 데뷔무대를 축하해주기 위해 왔다. 당시 동급생이 적잖게 있었지만 그 교수는 나 혼자만 지휘자로 입문시켜 주었다. 당시는 지휘자에겐 폼이 가장 중요한 걸로 착각했다. 이젠 아니라 생각한다. 지휘는 폼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로 얘기해야 된다. 말을 거창하게 잘 하는 것보다 진심을 담아 상대를 설득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동안 숱한 메이저급 지휘자를 만났을 것 같은데, 어떤 지휘자가 거장이라고 보는가.

“불멸의 지휘자는 하늘이 내린 존재다. 그가 무대에 서는 순간 단원들 스스로 그 카리스마에 압도돼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사람이다. 하늘로부터 받은 천품 때문이다. 뮌헨 필의 전설로 불리는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그런 사람인 것 같다. 그는 베를린 필의 전설인 카라얀을 우습게 봤고 상업적 레코딩을 경멸한 완벽주의자였다.”

▶내한공연을 오는 유수 외국 교향악단이 많은데, 항상 정단원이 다 오느냐 여부가 시빗거리가 된다.

“빈 필 정단원이 150여명이 된다. 하지만 출산, 휴가 등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은 120여명. 멤버들은 국립 오페라극장 반주는 물론 정기공연도 해야 한다. 외국 순회 때는 100여명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니 항상 예비단원을 확보해야 된다. 100% 정단원 외국공연은 불가능한 일이다.”

▶요즘 지휘자의 최대 능력과 자질은 뭔가.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신자유주의 논법이 지휘자들한테도 적용된다. 예전에는 지휘자를 선발할 때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가를 우선적으로 봤다면 요즘은 그 지휘자가 갖고 있는 스폰서, 티켓파워 등을 우선시 고려해 상임지휘자를 선정한다.”

▶실용음악이 흘러 넘치는 것 같다.

“러시아도 클래식 시장도 옛날만 못하다. 한 오페라극장 연말 특별 공연 때 무대에서 술도 마시고 음식도 먹도록 했다. 가수들도 객석에서 노래를 부르게 해서 엄청 비싼 티켓을 팔았다. 내가 극장장에게 질문했다. 왜 이런 공연을 하느냐. 그는 요즘 사람들이 세미클래식을 원하는 것 같아 그런 기획을 했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당신이 돈을 원한다면 우리 극장을 나이트클럽으로 만들고 우리 발레단을 일반인의 춤자리에 섞어주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클래식 위주의 극장을 운영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다. 영성을 향상시키고 내적인 행복을 만족시키기 위함이다. 한국의 실용음악도 마찬가지다. 돈이 된다고 해서 모두가 실용음악과로 통폐합시킨다면 한국의 음악도 머잖아 물질만능에 잡아 먹힐 것이다. 여론 리더들은 하고싶은 문화를 깔아주는 게 아니고 해야 될 문화를 선도하는 게 본무인 것 같다.”

▶러시아에서 본 한국은 어떤가.

“한국인은 정말 대단하다. 우리나라만큼 아름답고 열정적인 나라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왜 행복지수는 바닥일까? 영적인 뭔가를 채워줄 뭔가가 빠져 있다. 그게 바로 문화다. 나는 내 지휘를 통해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

▶한국 클래식 문화의 허와 실이 있다면.

“돈은 많이 풀렸다. 그렇지만 시스템은 예전 그대로다. 전국에 숱한 시립교향악단이 많이 생겼다. 하지만 예전 만들어 놓은 법과 시스템 때문에 역량 있는 음악인이 그 틀에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다. 베를린, 뉴욕, 빈 필…. 유수 교향악단이 대다수 국립이 아니라 민간 소유다. 정부가 지원은 하지만 운영은 그들이 자체적으로 알아서 하도록 한다. 국내 단원은 열심히 하든 안 하든 월급은 동일하니 자연 사명감도 낮아지는 것 같다. 러시아의 경우 마린스키극장(3개의 오페라 극장과 콘서트홀로 구성) 250명의 단원과 100명 이상의 발레단원 등 1천명 이상의 예술단을 세계적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에프 예술 총감독이 독자적으로 결정한다. 프로그램 결정 및 예산 집행까지 모두 그가 결정한다. 러시아의 음악지원 정책도 기본적으로 음악가에게 전담시킨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프로필

1992년부터 94년까지 독일 뷔르츠부르그 국립음대. 96년부터 99년까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를 수학 했으며 96년 오스트리아 브루크너 국립음악원 지휘과와 작곡이론과를 졸업했다. 2004년 러시아 글린카음악원 지휘과 최고연주자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동양인 최초로 비엔나 왈츠 오케스트라와 프라하 모차르트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역임했다.

2000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 필하모니를 시작으로 2001년 니즈니 노브고로드 오페라극장 지휘자 2004년부터 타타르스탄 국립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 또 볼고그라드와 울란우데, 모스크바 파크롭스키 오페라극장 지휘자를 거쳤다. 1994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비엔나 왈츠오케스트라 토론토필하모니, 모스크바국립오케스트라, 캐나다 한스빌음악축제, 하이든음악축제, 베르디 오페라축제, 대구국제오페라축제 등 현재까지 900여회 지휘봉을 잡았고 세계 150개 오케스트라와 연주했다. 거친 공연장만 300여개에 이른다. 현재 러시아 야쿠티아공화국 국립음악원 부총장 겸 오페라극장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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