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10] 낙포 이종문(1566~1638)과 하옹 이익필(1674~1751)

  •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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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24   |  발행일 2020-09-24 제12면   |  수정 2020-12-01
이종문 3부자 임란의병 맹활약…현손자 이익필은 무신난 토벌 선봉
하빈 출신 이종문, 전경창 문하 공부
부친·아우와 함께 왜적 토벌 공세워
임란후 세운 '하목정' 문인 교류의 장
인조도 능양군 시절 지나다 들러 유숙
1703년 무과 급제한 이익필 문무겸비
이인좌의 난 평정후 분무공신 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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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에 자리한 하목정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낙포 이종문이 세운 정자다. 1995년 대구시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된 뒤 2019년 12월 30일 보물 제2053호로 승격했다.

대구 달성에는 수많은 보물이 존재한다. 도동서원 중정당과 사당, 태고정, 현풍 석빙고, 운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등이 국가 보물로 지정돼 있다. 지난해에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하목정(霞鶩亭)이 보물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하목정은 단순히 아름다운 정자가 아닌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상(詩想)의 대상이자 그들이 교류한 장(場)으로서 의미가 남다르다. 유교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하목정의 주인은 전의이씨(全義李氏) 가문이다. 조선시대 달성에 입향해 터를 이룬 이들은 문과 무를 가리지 않고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서슴없이 몸을 던져 구국의 밀알이 됐다. 대표적인 인물이 하목정을 세운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과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전양군(全陽君) 이익필(李益馝)이다.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 인물 10편'에서는 낙포 이종문과 하옹(霞翁) 이익필의 삶에 대해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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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목정 뒤편에는 전양군 이익필의 불천위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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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안에 모셔진 이익필의 영정.

◆의병 활동에 나서

이종문은 1566년(명종 21)에 달성 하빈 하산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학가(學可), 호는 낙포다. 그의 가문이 달성에 터를 잡은 것은 예산현감을 지낸 조부 이필(李필) 때부터다. 이필은 경기도 부평(富平)에 거주하다 성주로 이거(移居)한 뒤 다시 하빈에 정착했다. 그가 영남으로 이주하게 된 계기는 사돈인 파평윤씨 가문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파평윤씨는 하빈과 고령(당시 성주)의 다산(茶山) 등지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사족이었다. 또한 당시 끊임없는 당쟁 등으로 인해 뜻있는 선비들이 은둔자적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필 역시 비슷한 판단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달성에 나고 자란 이종문은 그의 장인인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문하에서 공부했다. 퇴계 이황의 문인인 전경창은 대구지역 성리학 1세대로 불릴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큰 스승 밑에서 배움을 이룬 이종문은 1588년(선조 21) 22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한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잠시 손에서 책을 놓는다. 당시 대구지역 인사들은 공산의진군을 결성,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이종문은 하빈 4면의 대장 겸 서면장(西面將)을 맡았다.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장을 맡은 것은 그만큼 그의 능력이 출중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종문의 부친 이경두(李慶斗)와 아우 종택(宗澤)도 의병활동에 동참했다. 이들은 군량과 군수품을 제공해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 가문에서 3부자가 나라를 위해 몸을 일으킨 것이다. 그의 부친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한 공적으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됐다. 이종문 또한 군공으로 원종공신에 녹훈됐다.

임진왜란이 종결된 뒤 이종문은 자신의 서재를 중건해 하목정(霞鶩亭)이라고 편액했다. 지역 유교에 있어 큰 의미를 갖는 장소가 비로소 마련된 것이다.

이종문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문과에는 연이 닿지 않았다. 다행히 이종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기던 시관(試官)의 천거로 그는 1606년(선조 39) 금화사(禁火司) 별좌(別坐)에 임명됐다.

이후 그는 1609년(광해군 4) 제용감(濟用監) 직장(直長)을 거쳐 사헌부 감찰로 승진했고, 비안·양성·군위현감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는 1623년(인조 1) 정치적인 이유로 파직돼 고향으로 돌아오고 만다. 더 이상 그는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 머물면서 지역 유림들과 강학하며 여생을 보냈다. 1638년(인조 16) 6월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3세였다. 사후 그는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됐다. 후손들은 그의 유문을 수습해 낙포집(洛浦集)을 편찬하고, 1897년 전성세고(全城世稿)에 다른 이들의 문집과 함께 엮어 간행했다.

◆보물 제2053호로 지정된 하목정

하목정은 빼어난 경관을 갖춰 많은 문인이 시와 글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시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남긴 제하목정(題霞鶩亭)이다. 인조의 명으로 사가(私家)에는 없는 부연(겹처마)을 갖게 된 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인조는 능양군 시절 하목정을 지나다가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유숙한 일이 있었다. 이후 이종문의 아들 수월당(水月堂) 이지영(李之英)이 입궐하자 옛일을 잊지 않고 "하목정은 강산 경치가 좋은데 부연을 달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이에 이지영은 "사가에는 감히 부연을 달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했고, 인조는 "정자는 사가와 다르니 마땅히 지붕을 수리해 부연을 다는 것이 옳다"라고 하며 은 200냥을 하사했다. 왕명을 들은 이지영은 "부연을 단 뒤 출입을 금하고 감히 사사로이 거처로 사용하지 않겠습니다"고 하자, 인조는 다시 "거처하는 것은 폐하지 말고 내가 유숙한 표적을 남기면 되지 않겠느냐"며 하목당이라는 당호를 하사했다고 한다.

하목정은 명망 높은 선비들이 교유한 장소로 활용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데 모여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공유하던 곳이었다. 실제 이종문은 서사원(徐思遠), 여대로(呂大老), 장현광(張顯光), 송후창(宋後昌), 도성유(都聖兪), 도여유(都汝兪) 등과 금호강 선유를 즐기는 등 지역 인사들과 많은 교류를 가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1604년(선조 37) 조성된 하목정은 살림집의 사랑채 겸 별당으로 지은 건물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우측 1칸에는 앞쪽으로 누 1칸을 첨가하고 뒤쪽으로 방 1칸을 더 만들어 평면이 정자형(丁字形)으로 구성돼 있다. 처마곡선이 부채 모양의 곡선으로 된 특이한 형태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내부에는 김명석(金命錫), 남용익(南龍翼) 등 여러 명인들의 시액(詩額)이 걸려 있다. 조성 당시 하목정 우측에 안채와 사당, 행랑채, 사랑채, 새사랑채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1995년 5월12일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된 뒤 2019년 12월30일 보물 제2053호로 승격했다.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전양군 이익필

이종문의 현손자인 이익필은 1674년 달성군 하빈면 동곡리에서 출생했다. 자는 문원(聞遠), 호는 하옹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호탕한 성격에 겁이 없었다고 한다. 귀신의 허실과 유무를 알기 위해 늦은 밤에 사당을 지켜본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남다른 골격을 가졌던 그는 문무를 겸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1703년(숙종 29)에는 무과에 급제해 능력을 인정 받았다. 1710년(숙종 36) 선전관을 시작으로 부사정, 훈련원 주부, 도총 도사 등을 거쳐 1714년(숙종 40)에는 평해군수로 부임했다. 이후 죽산부사, 내금위장, 금위영 천총, 여주목사 직을 수행했다.

이익필의 가장 큰 업적은 무신난(戊申亂)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것이다. 그는 1728년(영조 4)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과 함께 금위우별장(禁衛右別將)에 제수돼 토벌에 나섰다. 특히 그는 양난 이후 계속된 태평세월로 인해 병사들이 적진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자 선봉에 나서 독전(督戰)했다. 죽산 전투에서는 금위좌별장 이수량(李遂良)과 더불어 용맹하게 싸워 난을 평정했다. 당시 그의 면밀한 전략과 기민한 활동, 용감한 투지에 종사관(從事官) 박문수(朴文秀) 등이 탄복했다고 한다. 안성과 죽산 등지에서 잇따라 반란군을 격파한 공적으로 그는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되고, 전양군(全陽君)에 봉해졌다.

난을 토벌한 뒤 전라병사에 임명됐고, 1730년(영조 6) 9월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됐다. 같은 해 그는 전라도 운봉현의 진황전(陳荒田) 71부 2속과 전라도 강진현 고군내면 등의 진황답(陳荒畓) 1결 21부 1속을 사패 전답으로 지급받았다.

이후 회령부사, 금군 별장, 도총부 부총관, 춘천부사를 역임한 뒤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머물렀다. 하목정에서 시를 읊고 자적하다 1751년(영조 27) 세상을 떠났다. 병조판서로 추증됐으며 시호는 양무(襄武)다. 저서로는 하옹문집(霞翁文集), 황원일기(黃猿日記) 등을 남겼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문헌 = 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달성 하목정, 전의이씨예산공파종중 하목정 보존회. 낙포 이종문의 생애와 하목정, 구본욱.

▨자문= 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
공동기획:달성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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