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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대구박물 관장 |
1906년 갓 서른을 넘긴 일본 도쿄제국대학 대학원생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허리춤에 권총을 찬 채 말을 타고 경주에 들어갔다. "나라를 위하여, 또한 세상을 위하여, 신은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들판에서… 경주여! 경주여! 십자군 병사가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심정은 지금 나의 마음이도다. 나의 로마는 눈앞에 있다. 나의 심장은 고동을 치기 시작한다"라며 제국주의 일본의 첨병임을 자임했다. 을사늑약 이전에 경주를 방문한 두 명의 일본 학자들과 다르게 그는 멀쩡한 석실분을 뚫고 들어갔고, 파고 파도 끝이 없자 적석목곽분을 폭파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09년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조사단은 통감정치 아래 대한제국 탁지부의 의뢰로 전국의 문화유산을 조사하고 목록화하였다. 이때 조사단원인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는 대구에서 경주로 마차를 타고 가며 금척리에서 신작로 공사 도중에 파괴한 적석목곽분을 관찰하였다. 이게 속내를 움직이게 했는지 실태조사를 넘어서서 서악동의 석실분과 황남동의 적석목곽분을 발굴하였다. 적석목곽분 조사는 이때도 완료하지 못했다. 야쓰이는 일본역사지리학회에 보낸 기행문에서 '1913년은 진구 왕후(神功王后) 신라정벌 1천550주년이기에 여름 강연회를 경주 땅에서 여는 게 어떨지'라고 썼다.
1915년에 세키노 조사단은 신라능묘 앞에 다시 섰다. 황남동 검총의 조사는 대규모 인력을 투입하고도 구조만 파악하는 정도였고, 보문동에서는 가장 화려한 금귀고리가 나온 이른바 부부총을 발굴하며 처음으로 적석목곽분의 바닥을 확인했다. 아울러 세키노 조사단보다 한 달 앞서 일본 역사학계의 거물이자 정치계에 영향력을 지닌 도쿄제국대학 교수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가 석 달 동안 식민지 조선을 조사하러 왔었다. 그는 보문동에서 또 다른 적석목곽분 한 기를 나흘 동안 발굴했지만 봉분 언저리만 팠을 뿐이었다. 이 보문동고분은 1918년 그의 제자인 하라다 요시토(原田淑人)가 다시 발굴하였는데, 신라 적석목곽분을 완전히 발굴한 첫 사례였다.
하지만 금관총이 발견되기까지 일본 학자들에게 신라능묘는 이리저리 계륵이었다. 그들이 찾고자 했던 진구 왕후의 신라정벌을 뒷받침할 그 무엇도 없고, 부장품도 성에 찰 정도가 아니었다. 미려한 신라 불교미술품에 비해 신라능묘는 덩치만 클 뿐 보잘것없는 게 아닌지 의심이 커졌고, 1910년대 후반에는 아예 조사대상에서 멀어졌다.
<국립대구박물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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