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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혼례 모습을 담은 조선 말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시집가서 잔 붓는 모양'. <프랑스 기메박물관 소장·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
◆수모
헤어·메이크업·의상부터 주례까지…만능 웨딩플래너
수모는 수식모의 준말이다. 우리말로는 머리 어멈, 즉 헤어디자이너다. 화장과 의상도 담당해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스타일리스트도 겸했다. 혼례가 있으면 신부가 입을 옷과 장신구를 빌려주고 예식을 원활하게 진행하는 웨딩플래너 역할도 맡았다. 수모는 조선시대 혼례에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이덕무의 '김신부부전'이라는 결혼식 기록에 따르면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면 수모가 합환주를 마시게 한 다음 덕담을 하며 축복한다. 수모는 신부의 도우미 역할은 물론 신랑 신부에게 조언하고 축복하는 주례 역할도 맡았던 셈이다. 전통 혼례는 주례가 없지만 굳이 찾는다면 사회자에 해당하는 집사보다 수모가 주례에 가깝다.
조선시대 한양은 동서남북중 5부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었는데 수모는 구역별로 활동했다. 가례(왕실 혼례)가 있으면 한양의 모든 수모를 대궐로 불러들였다. 행사에 참석하는 여성들의 머리 손질과 화장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궁중여성들이 착용하는 가체를 손질하는 일도 수모가 도맡았다. 대궐에 모인 수모들은 가체를 다듬은 뒤 다시 염색하고 광을 내어 새것처럼 만들었다.
한양 부잣집은 단골 수모를 지정해 두고 집안 여성의 몸단장을 전담하게 했다. 반면 시골은 수모를 구하기 어려웠다. 수모가 한양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1561년에 지어진 이문건의 '묵재일기'에 따르면 성주에 살던 이문건은 손녀의 혼례를 치르기 위해 청도에 사는 수모를 불러와야 했다. 청도군수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수모에게 뇌물을 주어가며 달랜 끝에 간신히 허락을 얻어서 노비와 말을 보내 태워왔다.
사치풍조가 유행하면 수모가 제재을 받았다. 1541년 사치스러운 혼례를 금지한 법령에 "신부가 청색· 홍색의 금실 두른 옷을 입으면 수모까지 죄를 묻는다"라는 조항이 있다. 1788년 정조는 한양의 수모들을 모아 가체 사용을 금지하는 방침을 전달하고 족두리를 착용하는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권장했다.
수모의 사례비는 꽤 많았다. 이문건의 묵재일기에는 "수모가 집에 도착하자 쌀과 팥을 열 말씩 주고 돌아갈 때는 무명 두 필을 주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모두 합치면 쌀 두어 가마 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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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이 그린 염색하는 모습. 〈프랑스 기메박물관 소장〉 |
◆염모
여성 옷 남성이 손댈 수 없어…고되지만 여성의 일 돼
19세기말 우리나라를 방문한 서양 사람들은 온통 흰옷으로 뒤덮인 시장의 모습이 흡사 솜밭같다고 했다. 서양에서 흰색은 평화의 상징이지만 동양에서는 전쟁의 상징이다. 흰색은 또 죽음을 상징한다. 흰옷은 원래 상복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상복을 자주 입었다. 팔촌 이내 친척이 죽으면 상복을 입었고 왕실에 상이 있으면 전 국민이 상복을 입어야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단벌이었다. 경조사에도 입고 평상시에도 입을 수 있는 옷은 흰옷밖에 없었다.
나라에서는 흰옷 입는 풍습을 골치 아파했다. 평상복과 상복의 구분이 없으면 예법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흰옷 대신 동방을 상징하는 푸른 옷을 입으라고 권장하기도 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이 관원들에게 푸른 옷을 입으라고 했다. 관원들은 염색 값이 비싸다며 다른 색깔로 바꿔 달라고 했다. 그러자 세종이 말했다. 노란 옷은 중국에서 흉복으로 간주하고 빨간 옷은 여자 옷 같고 남색 옷은 일본 옷 같으니 안된다. 푸른 옷을 입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세종의 푸른 옷 입기 캠페인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비용 때문인 듯하다.
염색한 옷은 부의 상징이었다.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 따르면 부자들이 화려한 옷으로 사치를 부리는 바람에 염색 값이 치솟았다고 한다. 가격은 비쌌지만 품질은 좋았다. 우리나라 염색 기술은 일찍부터 중국에 알려졌다. 송나라 때 왕운의 '계림지'에서 "고려는 염색을 잘하는데 특히 홍색과 자색이 아름답다"고 했다. 조선의 자주색 비단에 반해서 열 필 넘게 염색해 간 중국 사신도 있었다.
염색은 염모라고 하는 여성 기술자가 맡았다. 염색은 고된 육체노동이다. 그런데도 염색이 여성 업종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여성이 입을 옷을 남성이 손대는 것을 꺼렸기 때문인 듯하다. 남녀의 옷을 한데 보관하는 것조차 꺼리는 시절이었다.
고종 때 재정 백서 '탁지준절'에 따르면 염모에게 수공포라고 하는 공임을 지급했다. 비단 한 필(20m)을 염색하면 삼베 석 자 다섯치(약 1m)를 끊어준다. 비단 열 필을 염색해야 삼베 한 필이 될까 말까다. 쌀 대여섯 말 가격이다. 중노동의 대가치고는 결코 많지 않다. 그래도 달리 생계를 해결할 길이 없는 가난한 여성에게는 감지덕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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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하는 모습.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
◆침선비
집에서 남몰래 한 땀 한 땀…가난한 양반가의 생계수단
침선비는 바늘과 실을 다루는 여종이다. 원래 왕실의 의복을 전담하는 상의원 소속 노비다. 왕과 왕비의 옷을 만든다. 바느질뿐만 아니라 재단, 재봉, 자수, 다리미질까지 도맡았다. 부잣집에서는 침선비를 두고 옷의 제작과 관리를 맡겼다. 그러나 침선비를 둘 형편이 못 되는 집에서는 침가라는 삯바느질집을 이용했다. 삯바느질은 가난한 양반 여성의 몫이었다. 아무리 생계가 어려워도 양반 여성이 밖에서 남성들과 부대끼며 일하는 건 당시 그들의 도덕관념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가난한 여성들은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삯바느질을 선호했다.
바느질은 당시 여성들의 기본 소양이었다. 양반 여성들은 시집 가기 전에 모두 바느질을 익혔다. 남편의 실직에 대비한 일종의 직업훈련이었다. 책 읽을 줄밖에 모르는 양반 남성들에 비하면 훨씬 유용한 기술이었다. 고급 의류에 익숙했던 양반 여성들은 뛰어난 바느질 솜씨를 보유했다.
옷이 필요하면 직접 만들거나 누군가에 부탁해야 하는 시대였다. 더군다나 고급 의류는 전부 뜯어서 세탁해야 했으므로 빨래 한번 하면 바느질감이 수북이 쌓였다. 일자리가 필요한 여성들은 이틈을 노렸다. 솜씨 좋은 사람은 선수(善手)라 불렀다.
삯바느질은 상당한 집중과 인내가 필요하다. 가사 노동과 병행해야 하다보니 잠자는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북학의'의 저자 박제가는 열한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박제가의 공부를 뒷바라지했다. 훌륭한 선생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돈을 아끼지 않고 모셔왔다. 사람들은 그가 가난한 줄 몰랐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박제가는 회고했다. "등불을 켜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새벽닭이 울도록 주무시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 삯바느질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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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부분). 이른 봄날에 한 선비가 나귀를 타고 가다 버드나무 가지 위 꾀꼬리를 바라보는 그림이다. 버드나무는 옛 사람들이 이별할 때 그 가지를 꺾어 떠나가는 임에게 주던 습속으로 인해 이별을 상징하기도 했다. 홍랑도 최경창과 이별할 때 길가의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보내며 곁에 심어두고 자신을 보듯이 하기를 바랐다. 〈간송미술관 소장〉 |
◆방직기
변방 군관의 가사 도우미…금지된 사랑에 빠지기도
조선시대 무과에 급제한 군관은 1년 동안 의무적으로 최전방인 함경도 등지에서 복무해야 했다. 이들은 출신군관이라고 하는데 양반에다 무과에 합격한 신분이라 일반 군사보다 지위가 높은 장교 계급으로 볼 수 있다. 출신군관은 함경도 지방의 토착민으로 이루어진 토착군관보다 높은 대우를 받았다.
출신군관은 이미 가정을 이뤘다 하더라도 가족을 임지로 데려갈 수 없었다. 국방의무에 전념하기 위한 조치였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주거와 식사 문제부터 군복의 세탁과 수선 등 잡다한 일들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게다가 병이라도 앓게 되면 어디에 몸을 맡겨야 할지 난감한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타지에서 온 출신군관에게는 방직기를 한 명씩 배정하여 그 집에서 숙식하며 도움을 받도록 해 주었다. 방직은 원래 관아에 속한 심부름꾼으로 '방지기'라고도 한다. 방지기를 기생이 맡을 경우 방직기, 여종이 맡을 경우 방직비라고 불렀다. 이들은 일종의 당번병이자 가사 도우미 역할을 한 셈이다.
박계숙·취문 부자는 함경도 회령에서 군관으로 생활한 경험을 '부북일기'로 남겼다. 이 자료를 통해 군관과 방직기의 관계 그리고 생활상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1645년 4월3일에 기록한 부북일기에 따르면 "이날 낮부터 감기를 앓기 시작했다, 몹시 아팠다. 부사가 보내 준 죽을 먹고 온돌에 누워 땀을 흘렸다. 월매가 내내 병구완을 해 주었다. 월매와 이야기할 때마다 눈물이 흘렀다. 방직기인 의향이 마침 자리에 없어 의향의 어머니가 월매와 함께 병구완을 하러 왔다" 는 내용이 있다.
큰일이 나면 여러 방직기들이 함께 힘을 합쳐 처리하기도 했다. 방직기의 어머니는 뗄 나무와 반찬, 술, 안주 등을 제공하며 정성을 다해 군관을 대접했다. 방직기는 BOQ(독신 장교 숙소)제공부터 취사, 보급, 정비, 간호 등 다양한 업무를 일사천리로 해 준 군 생활의 가사 도우미였다.
군관과 방직기의 관계는 군관의 임기와 함께 끝난다. 방직기는 해당 고을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개인의 첩이 되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관과 방직기가 뜨거운 사랑에 빠진 사례도 있다. 고죽 최경창과 그의 방직기 홍랑이다. 그녀는 1573년에 지은 '홍랑가'에서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라고 노래했다.
유선태기자 youst@yeongnam.com
▨출처=조선잡사(강문종 등 공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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