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영남일보 문학상] 단편소설 당선작 - 임은영 '블랙 잭나이프' (상)

  • 임은영 영남일보 문학상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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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03 08:11  |  수정 2022-01-03 13:36  |  발행일 2022-01-03 제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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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규 作

지하철 승강장을 걷다가 동전 하나를 주웠다. 손바닥을 폈을 때 숫자가 보이면 떠나고 학이 보이면 이 도시에 하루 더 머물 것이다. 동전을 공중으로 높게 던지고 떨어지는 방향으로 팔을 뻗었다. 손바닥을 펴자 학이 난다. 녹이 슨 탓일까, 날갯짓이 무거워 보인다.

해가 저물면서 바람이 제법 차다. 스카프를 꺼내려고 배낭에 손을 넣었다. 손을 휘젓는 동안 차가운 질감의 잭나이프를 스친 느낌이 없다. 나는 배낭 입구를 벌리고 안을 뒤졌다. 잭나이프가 보이지 않는다.

퇴직하던 날, 아버지는 내게 세관통관번호에 관해 물었다. 해외 직구로 사고 싶은 물건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가리킨 건 '블랙 잭나이프'였다. 평소 당신 물건을 사는 일이 잘 없던 아버지였다. 나는 서둘러 주문해주었다. 물건은 배송되어 오는 데만 보름이 걸렸다. 아버지는 캠핑장을 만들 거라고 꿈꾸듯이 말했다.

아버지가 항상 가지고 다녀서일까.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생각하면 잭나이프가 절로 떠오른다. 아버지는 그것으로 봉투나 상자를 열고, 노끈을 자르고, 과일을 깎고, 방어용으로도 몸에 지녔다.

아버지 집을 나오면서 거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잭나이프를 챙겼다. 그걸 잃어버리다니. 며칠 전, 청소 아르바이트를 했던 이층집이 스친다. 거기서 흘린 걸까.

역을 빠져나와 공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30분 정도면 이층집에 도착할 수 있다. 산책로를 따라 강이 길게 뻗어 있고 수면 위로 크고 작은 낙엽이 바람이 부는 대로 떠다닌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도 가끔 눈에 띈다.

아버지가 머루를 데리고 온 날도 가을이었다. 웬 강아지냐는 오빠의 물음에 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한 시간 전부터 날 쫓아온 게 여기까지 온 거야. 아버지는 머루를 내치지 않았고 머루는 아버지를 잘 따랐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던 날도 아버지 옆을 지킨 건 오빠와 내가 아닌 머루였다.

벨을 길게 눌렀다. 외출 중인가, 여러 번 눌러도 인기척이 없다. 나는 대문 앞에 앉아 누구라도 오기를 기다렸다. 날이 점점 어두워 온다. 일어나서 현관문을 두드렸다. 반응이 없다. 주인이 그사이 비밀번호를 바꾸었을까? 혹시 문이 열리면 물건만 찾고 나오면 될 것이다. 안전키의 덮개를 올리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공영일, 비밀번호를 잊을 리 없다. 엄마의 이름이 공영이니까. 문이 열린다.

파라솔과 벤치가 놓인 정원은 나흘 전 그대로다. 대문을 닫고 돌아섰을 때 그림자 하나가 벽 뒤로 어른거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개의 그림자 같기도 하다.

나는 청소 왔던 날의 기억을 찬찬히 되살려본다. 집을 나와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이곳 C 도시에 잠시 머물렀다. 게스트하우스를 전전하며 어영부영 시간을 죽이다 보니 통장잔고가 바닥을 드러냈다. 일자리가 필요해 급하게 구한 게 청소 알바다.

잭 칼을 맨 처음 꺼낸 건 베란다에 설치된 그물막을 없앨 때였다. 그물막을 쓰레기봉투에 담고 칼은 호주머니에 넣었을 텐데. 그때 바닥에 흘린 걸까. 만약 그렇다면 누군가 주워서 수납장에 넣었을지도 모른다.

현관에 신발이 보이지 않는다. 운동화를 들고 현관 안으로 서너 걸음 걸을 때까지도 인기척이 없다. 붙박이장 문을 연다. 밑창과 굽이 연결된 웨지 스타일의 여성용 구두가 보인다. 거실 쪽으로 걷는다. 천장이 높은 거실과 베란다로 통하는 슬라이딩 도어의 통유리 창문이 눈에 들어온다.

휑하던 거실에 가구가 채워져 있다. 거실 중앙에 4인용 소파가 스툴과 함께 니은자로 놓였다. 소파 뒤에는 키 작은 장식장 두 개가 벽면을 따라 나란히 서 있다. 장식장 내부에는 원색 계열의 찻잔이 가득하다. 찻잔 아래에는 여행지에서 가져온 듯한 그림엽서가 어지러이 쌓여있고 작은 종들과 다양한 종류의 오프너가 뒤섞여 있다.

잭 칼은 어디에 있을까, 거실 수납장을 둘러보고 안방으로 갔다. 붙박이장 안으로 두툼한 이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맨 왼쪽 칸에 의료용 보조기가 보인다. 아버지가 사용하던 관절 보조기와 비슷하다. 주방으로 와 싱크대를 뒤져도 잭 칼은 보이지 않는다. 이 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오른쪽에 스피커가 달린 미디어 룸, 맞은편 방은 게스트룸이다. 두 방을 확인하고 아래로 내려왔다.

주인이 들이닥치기 전에 나가야 하는데 잠깐만 쉬다 가자는 마음이 발목을 잡는다. 베란다에 놓인 안락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는다. 구름에 반쯤 가려진 달이 눈에 들어온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캠핑장처럼 지대가 높은 곳이다. 날이 밝으면 공원이 훤히 내다보이고 커다란 창문 밖으로 가을 풍경이 가득 찰 거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에 캠핑장을 만들었다. 건립조건이 까다롭지 않을 때였다. 사람을 불러 땅을 고르고 시설을 정비해 캠핑장을 시작하는 데 반년도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회사에 다니면서 주말에는 캠핑장을 오갔다. 잭 칼이 수호신이라며 항상 몸에 지녔지만 내겐 흔한 접이식 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캠핑장에 텃밭을 일구고 블루베리 농장을 만들었다. 새를 막기 위해 나무작대기에 고무를 걸어 새총도 만들었다. 나는 농장에 가면 새총부터 쥐었다. 새를 쫓는 게 아니라 블루베리만 떨어뜨린다고 아버지가 언짢아해도 몰래 새총을 쏘곤 했다.

이 년을 근무한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집으로 내려온 날, 아버지는 내게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블루베리를 따다 주었다. 왜 그만두었냐고 물어도 답하지 않았을 거다. 입에 옮기기조차 싫었다. 반 아이가 등원하자마자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3세라도 말이 늦는 아이였다. 다리를 살펴봐도 다친 흔적은 안 보였다. 아이 집으로 급히 연락했다. 어머니가 와서 아이를 데리고 갔다. 오후 수업 중에 어머니가 교실에 들이닥쳤다. 아이가 발목 인대가 늘어났다며 내 뺨을 후려쳤다. 반 아이들이 놀란 눈으로 보고 있었다. 뒤늦게 원장이 달려와서 무조건 부모에게 빌라고 했다. 나는 원장 말을 듣지 않고 일을 그만두었다.

그날 밤 아버지가 준 블루베리를 안주 삼아 와인 한 병을 혼자 다 마셨다.

그해 여름 내내 비가 내렸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창밖을 두드리는 빗줄기만 바라보는 날이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이집에서의 피로감이 조금씩 회복되었다. 어쩌면 다가올 가을에는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설핏 들었다. 하지만 여름은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전국이 태풍에 휩싸여 피해지역이 많았다. 아버지의 캠핑장도 안전하지 못했다.

폭우가 캠핑장을 덮친 날, 아버지는 밤늦게 귀가했다. 자정이 되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비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한숨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한참 뒤에서야 한숨이 코 고는 소리로 바뀌었다.

잠을 설치다 새벽 한 시가 지나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잠결에 쿵, 소리가 나서 일어났다. 정전 상태였다.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방에서 나갔다. 발바닥이 아렸다. 넘어진 거실장 앞으로 깨진 유리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소음에 섞여 들려왔다.

옆방으로 갔다. 아버지가 소리쳤다. 천장이 무너져 벽 안에 갇혔다고. 방문이 열리지 않았다. 119로 전화를 걸 때 등 뒤로 차고 단단한 것이 나를 스쳤다. 돌아보니 서너 걸음 뒤에 거울이 떨어졌다. 아버지가 내게 먼저 나가라고 했다. 천장에서 철 구조물이 돌 부스러기와 함께 쏟아졌다. 나는 몸을 돌렸다. 아버지를 두고 현관 쪽으로 뛰었다. 집 안의 가구들이 넘어지고 부수어지고 벽이 허물어졌다.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많은 것들이 폭우에 휩쓸려 사라졌다. 아버지의 거처는 무너졌고 야영객이 잠을 자던 컨테이너들은 강어귀에 처박혔다. 아버지가 정성껏 가꾼 블루베리 농장과 텃밭이 쓸려갔다. 해마다 만들던 매실청도 만들 수 없게 되었다. 나무들이 뿌리째 뽑혔다.

뒤늦게 구조된 아버지는 잭 칼부터 찾았다. 일흔다섯인 아버지는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머리와 다리를 다쳐 치료 뒤에도 거동이 불편했다. 아버지를 보살필 사람이 필요했다. 기력을 되찾을 때까지만 요양 병원에 계시는 건 어떠냐고 오빠가 물었을 때 아버지는 베개를 던지고 오빠에게 평생 안 하던 욕설까지 퍼부었다.

아버지가 떠오르면 딸꾹질이 나온다. 지금도 그러하다. 아버지를 두고 혼자 집 밖으로 나간 것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피곤함이 몰려온다. 수납장을 더 찾아봐야 하는데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온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이 검은 바다 같다.

잠결에 벨 소리가 들린다. 인터폰에서 방문자 벨이 요란스럽게 울린다. 여기서 자다니. 현관문 밖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려온다. 문을 열라는 다급함에 재빨리 이 층으로 몸을 피했다. 핸드폰을 보니 벌써 열 시다.

누굴까? 문틈으로 귀를 기울인다.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가깝게 들린다. 일 층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준 미니 망원경을 배낭에서 꺼냈다. 베이지색 재킷을 걸친 중년 남자가 앞서고 병원 유니폼을 입은 청년 두 명이 뒤따른다. 계단 옆으로 간이침대가 옮겨진다. 침대에 사람이 누워있다. 체형이 왜소하고 긴 머리인 걸로 봐서 여자 같다. 몸이 불편한 모양이다. 움직임이 없다.

"여기가 안방입니다. 조심하세요. 아내가 놀라요."

말투로 봐서 주인 남자 같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다 목소리가 나긋하다. 남자가 앞치마를 두른 젊은 여자에게 약봉지를 건넨다.

"약, 잊지 말고 먹여요."

"수민 씨를 돌본 지 벌써 일 년이에요. 약 정도는 제때 먹일 수 있어요."

여자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편안해진다. 남자가 입을 열 때마다 여자는 긍정의 제스처를 반복적으로 보인다.

안방으로 들어간 남자가 밖으로 나와 여자를 부른다.

"곧 겨울이네요. 이불 좀 두꺼운 거로 가져다줘요. 아내가 말을 못 하니 알아서 챙겨줘요."

"알았어요."

여자의 대답이 짧다.

잠시 뒤 청년들이 주인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 출구 쪽으로 걸어간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클랙슨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창가로 가서 블라인드 한 자락을 들었다. 흰 개 한 마리가 차 주위를 어슬렁거리더니 슬그머니 사라진다.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전원을 끄려고 보니 오빠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여러 차례 와 있다. 전화를 받지 않자 문자를 보냈다. 그만 좀 해.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을 거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너 때문이 아니라고. 매번 같은 내용의 문자다. 가끔 철자가 틀리거나 어순이 바뀌는 경우가 있지만 문자에 담긴 의미는 비슷하다. 딸꾹질이 올라와 소매로 입을 막는다.

사고 뒤에도 아버지는 휠체어에 앉기보다 걸으려고 애썼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시트러스 향의 화장품을 바르고 거울을 자주 들여다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몸이 회복되지 않자 조금씩 변해갔다. 냉장고를 열고 직접 반찬을 꺼내 식탁에서 밥을 먹는 모습은 더 볼 수 없었다. 침대에서 식사하려고 떼를 쓰고 아침, 저녁으로 하던 세수를 하루에 한 번, 언제부턴가 격일로, 그러다 며칠에 한 번 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좋은 낯빛은 이내 거무스레해졌다.

아버지는 예전과 다르게 침대에 자주 누웠다. 안방을 들여다보면 늘 자는 것 같았다. 잠을 깨우면 짜증을 내고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없던 식탐까지 생겨 체중이 표나게 늘어났다.

바깥 볼 일이 있을 때는 휠체어를 침대 앞에 두고 나왔다. 식사 시간을 챙기지 않는 날이 늘자 아버지가 입을 닫았다. 딸의 무신경함이 섭섭하고, 무시당한다는 것에 화가 났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외출을 하고 종종 밤늦게 귀가했다. 친구를 만나 자주 가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서 스파게티를 먹고 와인을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보면 집으로 가는 시간이 늦어졌다. 감옥 같겠다고, 한 친구가 농담 삼아 한 말에 다른 친구들이 점심 내기를 했다. 내가 언제까지 아버지를 돌볼지를, 얼마나 버티는지, 반년과 일 년 중 하나에 걸었다.

시간이 흘러도 아버지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물의 이름을 자주 잊었다. 인지력에 문제가 생기면서부터는 잭 칼에 집착했다. 날카로운 것이라 옷장이나 서랍장에 숨겨도 귀신처럼 찾아내서 주머니에 넣었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다. 요양원에 대해 여쭤보면 어눌한 말로 가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곳은 유령의 집이야. 요양원에서 무엇을 본 걸까, 아버지는 뭔가를 되새기며 완강히 거부했다.

오빠는 회사 일로 바쁘다고 집에 오지 않았다. 뭐든 필요한 건 다 사준다고 했지만 딱히 오빠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아버지의 체크카드로 충분했다. 가끔 밖에 나가면 쇼핑을 하고 들어왔다. 집안은 생활에 필요하거나,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로 쌓여갔다.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하면서도 옷장을 자주 뒤졌다. 잭 칼을 찾다가도 자신이 무얼 찾는지 종종 잊어버렸다. 내 옷을 휘감고 즐거워하다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를 못 본 척하거나 함께 놀이를 했다. 카드놀이를, 숨바꼭질을, 줄 당기기를 했다. 나보다 머루가 아버지와 더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두루마리 휴지를 던지면 머루는 꼬리를 흔들며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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