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영남일보 문학상] 단편소설 - 임은영 '블랙 잭나이프' (하)

  • 임은영 영남일보 문학상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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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03 08:25  |  수정 2022-01-03 13:35  |  발행일 2022-01-03 제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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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규 作

나의 일상도 흐트러졌다. 아버지 때문만은 아니다. 몇 년을 사귄 동아리 선배와 헤어졌다. 선배는 직장 동료와 연애를 시작했다고 내게 통보했다. 대학 선배로 만났지만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다. 졸업 후 지인 소개로 다시 만난 사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배와 헤어진 뒤로 일주일에 두 번 가는 요가가 지루해졌고 즐기던 쇼핑도 귀찮아졌다.

친구들과의 수다도 심드렁해지고 어느 순간 밥 냄새가 싫어졌다. 아버지의 식사를 챙기다가도 헛구역질이 났다. 머루는 운동을 시키지 않아 비만이 되었고 목욕을 못 해 털이 지저분해졌다. 아버지와 머루를 걱정하면서도 집을 떠나는 생각을 때때로 했다.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 더 못하겠어. 미쳐버릴 것 같아.

- 엄살은.

오빠는 처음엔 나를 달래더니 횟수가 잦아지자 화를 냈다.

- 요즘 취업하기 얼마나 힘든데 일이라고 여겨.

- 잠시라도 떠나고 싶다고.

- 나도 바빠. 돌아버리겠어. 도우미와 간병인을 부르라고.

그 뒤로 오빠는 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작년 가을을 버티지 못했다. 당분간 찾지 마. 아버지를 부탁해. 오빠에게 문자를 보낸 뒤 핸드폰을 식탁에 두고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현관에서 내게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버렸다. 딱히 갈 곳은 없었다. 가능한 집과 거리가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제주도에 머물다 친구가 있는 도쿄로 갔다. 열흘 정도 지내다 보니 도쿄의 뒷골목이 마음에 들었다. 빈티지 골목과 특색 있는 작은 서점들을 돌아다니다 좋아하는 초밥을 먹었다. 다시 식욕이 생겼다. 도쿄에 더 머물고 싶어졌다. 친구 소개로 베이커리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디저트 스쿨도 다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일 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안 보였다. 오빠에게 연락해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그동안 잘 지냈냐고? 오빠는 전과 다르게 차분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오빠는 할 말을 미리 준비라도 한 듯 말을 이었다.

- 요양원에 모시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간병인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집을 나가셨어.

- 어디로?

- 사고가 났어. 근처 도로에서. 밤이어서 운전자가 보지 못했대.

- 지금 아버지 어디 계셔?

- 떠나셨어. 사고 후유증으로. 한 달이 지났어.

오빠에게 바로 달려갔다. 아버지를 왜 그렇게 보냈냐고?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오빠가 입을 열었다. 너는 핸드폰도 두고 갔잖아. 연락도 안 되고. 처음으로 우리는 격하게 다투었다. 서로를 탓하고, 저주의 말을 퍼붓고, 함께 울었다. 서로에게 잊지 못할 욕을, 모욕을. 나는 오빠에게, 오빠는 나에게.

그때부터 딸꾹질이 더 자주 올라왔다. 소리를 너무 질러 목이 놀란 걸까. 친구들은 목에 혹이라도 생긴 거 아니냐고 우려했다. 딸꾹질이 사라지지 않아 병원에 들렀지만 이비인후과 의사는 검사 결과로 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여러 사이트에서 딸꾹질에 대한 자료를 검색해도 특별한 정보는 안 보였다.

아르바이트하다 딸꾹질로 난처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어떤 편의점 점주는 처음엔 웃다가 나중엔 신경 쓰인다며 짜증을 냈다. 딸꾹질 뒤 시큼한 것이 올라와 내과 질환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집 근처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의사는 종합검진을 받아보라고 했다. 검진 결과에서도 건강상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사회생활이 불편한 정도라고 약을 처방해 달라고 하자 의사는 약 대신 신경정신과 상담을 권유했다. 그 뒤로 병원에 다시 가지 않았다.

일 층을 살피다가 발이 저려 주저앉았다. 잭 칼만 찾아 이 집에서 나가면 되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밤이 되면 움직이기 편할까, 아니 새벽이 나을지도 몰라. 고민하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는 주인 남자가 보인다. 남자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는 서둘러 차를 탄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차를 보자 긴장이 풀리고 피로가 몰려온다.

인터폰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누가 방문한 걸까? 아니면 간병인이 나가는 걸까? 간병인이 나간 거라면 칼을 찾아 이 집을 떠날 기회다. 바깥을 보니 골목에 쿠팡 차량이 보인다. 택배물이 온 것 같다.

오후가 되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옆에 있는 생수병을 들이켜고 벽에 몸을 기대었다. 간병인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이 층까지 들린다.

"못 나가. 일하는 중."

아래층을 주시했다. 핸드폰을 가지고 서성거리는 간병인의 모습이 보인다.

"주인 남자는 주말에만 오고 아내는 귀찮게 하지 않아. 부르는 일이 없어. 잠만 자거든."

여자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짐작할 뿐이다.

여자가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온다. 짧은 반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머리는 하나로 묶는다. 요가 동작을 되풀이하며 통화한다. 목소리가 밝다.

"네가 이리로 와."

상대방이 뭐라고 한 걸까, 여자가 목청을 높여 말하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아무도 없다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와."

간병인은 전화를 끊고 다시 흥얼거린다. 아무도 없다니, 주인 여자는 투명 인간인가. 간병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 다리를 뻗고 잠깐 누웠다. 방바닥이 차서 내장이 서늘해지는 것 같다. 속에서 비릿한 냄새와 함께 딸꾹질이 또 올라온다.

등이 차가워 일어났다. 밖을 내다보니 간병인의 옷이 또 바뀌었다. 외출이라도 하는 걸까. 모자까지 쓰고 있다. 간병인이 장바구니를 들고 대문 밖으로 나간다. 나는 서둘러 배낭을 챙겼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왔다. 잭 칼은 어디에 있을까. 눈에 띄는 곳, 몇 군데만 살펴보고 없으면 그냥 나가야 한다. 안방을 들여다보았다. 잠이 들었을까. 주인 여자는 미동도 없이 누워있다. 정수기에 컵을 대고 냉수를 받아 물을 마시려다 컵을 제자리에 두었다.

지하에는 수납장이 많다. 나는 생수병을 꺼내 배낭에 넣었다. 수납장 안에는 참치, 스팸, 다양한 통조림과 각종 생필품이 보관되어 있다. 청소하러 온 날, 청소업체 직원이 투덜거렸다. 사재기했다고. 그러면서 수납장에 든 전기 포터를 꺼내 컵라면을 슬쩍 먹었다. 두세 개 없어져도 모를 거라고.

나는 주방으로 올라와서 싱크대를 살폈다. 잭 칼이 안 보인다. 보조 주방에서 서랍을 살필 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안방 문 뒤로 몸을 숨겼다.

남자의 목소리다. 간병인과 통화하는 것 같다.

"시장에 갔다고요? 지갑을 두고 가서 챙기려고 왔는데 안 보여서요. 안방에 둔 것 같은데."

남자의 발걸음이 안방 쪽으로 향하고 있다. 나는 서둘러 침대 아래로 들어갔다. 침대 밑으로 휴지를 던지기라도 한 걸까, 쌓인 휴지를 밀어내고 자리를 잡았다. 먼지 때문에 코가 간지럽다. 핸드폰 벨이 울리고 남자가 전화를 받는다.

핸드폰 밖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엄마는 며느리가 자는 것도 걱정이야?"

남자가 투덜댄다.

"놓아주긴. 내가 뭘 붙잡는다고!"

통화 내용은 잘 들리지 않지만 남자의 목소리가 거칠다.

"또 참견이야. 어디로 보내라고?" 남자가 혼자 중얼거리더니 버럭 소리를 지른다.

"요양 병원은 무슨. 쓸데없는 소리."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수상하다.

"눈 감기 전에는 여기서 못 떠나."

남자의 도트무늬 양말이 안방 바닥을 쓸고 다닌다.

딸꾹질이 나와 가까스로 숨을 참았다.

남자가 침대 쪽으로 다가온다.

"그래. 계속 자. 이렇게 수명대로 살아."

저 남자 도대체 뭐지? 이상한 남자잖아. 나는 살짝 기분이 나빠진다.

주인 여자는 지금 빨랫줄에 걸린 이불처럼 누가 수거해갈지도 모른 채 축 늘어져 있다. 아무렇게나 개켜진 상태로 옷장에 들어가서 누군가가 꺼내주기 전에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옷처럼 꼼짝없이 갇혀있는 건 아닐까.

서랍을 여닫는 소리가 나고 곧 발소리가 멀어진다. 딸꾹질이 올라와서 소매에 얼굴을 급히 묻었다. 남자가 돌아선 건가. 발의 방향이 갑자기 바뀐다.

"너, 딸꾹질한 거니?"

남자가 혼잣말 끝에 거실 쪽으로 걸어 나간다. 곧이어 현관문이 쾅, 닫힌다.

침대 밑에서 가까스로 나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미친놈이군."

"그래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인 여자와 나밖에 없다. 여자는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는다. 잘못 들은 거겠지. 다시 여자를 바라본다. 허공에서 눈길이 마주친다. 여자의 눈가가 짓물러 있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왔어요."

이참에 주인 여자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무단침입자로 신고되면 곤란하니까.

여자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지나간다.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누가 온 걸까. 간병인이 들이닥치기 전에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저, 저기요?"

"네?"

"개가 날 찾아요. 우리 개. 밥 좀 ……."

자기 걱정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은데. 개 걱정은. 나는 못 들은 척 뒷걸음질 친다.

침대 맞은편 화장대 위에 흰색 약통이 보인다. 얼마 전 남자가 간병인에게 건넨 약통 같다. 여자를 돌아보았다. 다시 잠이 든 걸까. 침몰하는 배처럼 헝클어진 이불 속에 죽은 듯이 몸을 맡기고 누워 있다. 여자의 약통이 마음이 쓰인다. 아버지는 유독 푸른 띠를 두른 약통을 보면 바닥에 패대기치듯 던졌다. 내가 수면제를 먹인 걸 아버지는 몰랐을 텐데.

거실 수납장을 뒤적이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를 부른다.

"저, 전화 좀……. 받을 사람도 없지만."

여자의 동공이 흔들리며 커졌다.

나는 여자에게로 몸을 바짝 붙였다.

"말씀하세요. 뭐라고요?"

여자는 대답이 없다. 기력이 없는 건지, 다시 잠든 건지, 무슨 이유로 입을 다물었는지 알 수 없다. 피곤한 일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뒤로 물러설 때였다.

"기……기다릴게요."

다가갔을 때는 이미 여자의 눈꺼풀이 내려간 뒤였다. 잠이 든 것 같다.

거실로 나와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안방을 돌아봤다. 계속 잠만 잘 것 같은 여자의 방으로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마음이 헛헛하여 안방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꼼짝없이 누운 채로 마음 나눌 친구 하나 없이 언제 끝날지 모를 시간을 죽여 가는 것. 다가올 미래의 시간이 더 나을 것이라는 믿음 따위는 이미 버렸을지도 몰라. 날마다 눈을 뜨면 언제 들어갈지 모를 자신의 관을 짜고 있을 여자의 모습이 스친다.

개 짖는 소리가 또 들려온다. 저 소리가 잠든 여자를 계속 깨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주방으로 가서 수납장 한쪽에서 본 애견용 사료를 꺼냈다. 여자의 개를 생각하며 정원 뒤쪽을 한 바퀴 돌았다. 개집이 보인다. 배설물을 치우고 개집에 깔린 방석을 꺼내 털었다. 사료를 봉지째 두고 일어서는데 머루가 떠오른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보이지 않는 머루. 여자의 개처럼 머루도 집 주위를 배회하고 있진 않을까.

출구 쪽을 바라보며 걸었다. 머루를 찾는 것. 그것이 아버지가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설핏 든다. 나는 걷다가 개집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서너 발치 앞에 금속 재질의 뭉텅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잭나이프. 체리 나무로 된 손잡이가 풀에 묻혀 반쯤 드러나 있다.

잭 칼을 가지고 대문 밖으로 나가려는데 간병인이 들어선다. 여자 한 명이 비틀거리며 뒤따른다. 여자의 손에 맥주 캔 두 개가 들려있다. 두 사람은 정원에 있는 야외용 테이블에 앉는다. 야외 조명이 테이블을 훤히 비추었다.

"오. 풀장이 있네. 여기 누가 살아?"

여자의 말에 간병인이 키득거린다.

"잠자는 공주."

"정말?"

"잠만 자거든."

"좀 깨우지?"

"아니. 공주가 깨어나면 난 실업자가 돼. 목소리 낮춰."

여자들이 소곤소곤, 수다를 떤다.

"캔 맥주 더 있어?"

"당연하지. 창고에 널린 게 술인걸."

간병인 여자가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조용한 밤공기를 뒤흔든다.

대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기다릴게요, 금방이라도 감겨서 다시는 뜨지 못할 것 같은 눈으로 겨우 내뱉던 여자의 말이 아버지의 말과 겹쳐진다. 잘 다녀오라고 내게 손을 흔들어주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아버지의 손처럼 여자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을 거다. 멈추지 않는 딸꾹질과 함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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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영 영남일보 문학상 당선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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