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한국문학] 산책하기 좋은 날이다 정말

  • 현영희 경북대 국제교류처 초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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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3-24   |  발행일 2022-03-24 제22면   |  수정 2022-03-24 07:15
韓 후장사실주의 대표주자
정지돈 작가의 '당신을 위한…'
인문학 산책 체험하기 적합
코로나 폭증속 맞이한 봄날
대구의 산책문학 출간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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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영희 (경북대 국제교류처 초빙 교수)

요즘은 봄이 오면 초록보다 분홍이 먼저 떠오른다. 흩날리는 벚꽃 잎이 장범준의 연금처럼 울려 퍼질, 이 거리는 영화감독 웨스 앤더슨이나 사진작가 테레사 프레이타스가 구축한 파스텔 빛 세계의 전부처럼 보인다. 로베르트 발저는 그의 단편 '산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 최고로 아름답고, 좋고, 간단하다. 신발만 제대로 갖춰 신은 상황이라면 말이다." 발저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산책과 함께했다. 그는 1956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에 눈 쌓인 숲을 산책하다가 78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3월12일 WHO는 코로나19에 대한 국제적 공중 보건 비상사태 종료 선언을 위한 조건을 검토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3월14일에는 신규 확진 세계 1위라는 치명적인 타이틀을 한국에 수여하기도 했다. 전 세계 확진자 3명 중 1명은 한국인이다. 확진자와 자가격리자들은 인후염과 고열을 참아 내며 일주일간의 정지된 공간을 견디고, 평범해야 할 일상들은 가택 연금되어 계엄령이 내린 창밖만 공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정지돈 작가의 산문집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은 이러한 시대에 문학과 철학을 통한 인문학적 산책을 체험하기에 좋은 책이다.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일종의 산책기다. 정지돈은 서울과 파리를 걷다가 여러 철학자와 문학가들의 세계로 거침없이 틈입한다.

정지돈은 대구 출생의 1983년생 젊은 작가이며 소위 '후장사실주의'의 대표주자다. 후장사실주의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굉장히 어렵다. 정지돈과 그의 친구들이 농담인 듯 진담처럼 꺼낸 말이지만, 후대에 한국에서의 누보로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후장사실주의가 될 것이다. 그들을 보면 1930년대 이태준, 박태원, 이상 등이 주축이 된 구인회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들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모태가 되었다.

정지돈의 등단 이후 첫 단편 소설집 '내가 싸우듯이'는 책 마지막에 무려 9쪽에 걸친 참고문헌 목록을 수록했다. 정말로 마음먹고 싸우듯이 읽어야 읽히는 작품들이 많다. 이로 인해 '지식 조합형' 소설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도리어 '그렇다면 전통적인 소설들은 서사 강박형 소설인가요?' 하고 받아치기도 했다.

한국의 산책 문학으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있었다. 정지돈의 산문집도 편집자로부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에세이 버전을 권유받아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26세의 구보씨가 정오부터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경성(지금의 서울) 곳곳을 배회하며 보고 겪고 떠올린 것들을 기승전결 없이 묘사한 것이 주 내용이다. 조선중앙일보 연재 당시 박태원의 절친 이상이 삽화를 그려 주기도 했다. 이 작품은 현대 문학사뿐만 아니라 도시의 역사를 위한 사료로도 가치가 있다.

언젠가는 대구를 배경으로 좋은 산책 문학이 나올 수 있다면 좋겠다. 다만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처럼 주인공이 지식인일 필요도 없고, 무기력할 이유도 없다. 주인공은 소셜임팩트 플랫폼인 빅워크 애플리케이션을 실행시키고 자신의 걸음 수를 기부하기 위해 화창한 거리를 나설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날아오르는 풀벌레나 형용할 수 없는 설렘을 향해 송승언의 시 '사랑과 교육'의 첫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다. 좋은 날이야 산책하기 좋은 날이다. 정말.

현영희 (경북대 국제교류처 초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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