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한국문학] 우리 근대문학 속의 학, 백로와 두루미

  • 김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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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4-28   |  발행일 2022-04-28 제22면   |  수정 2022-04-28 07:10
학과 사람, 운명공동체적 삶
표현한 이범선의 '학마을…'
전쟁의 비극과 이념 초월한
우정 그린 황순원의 소설 '학'
평화의 염원 학을 통해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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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며칠 전 범어도서관에 들렀다가 뒷산에 자리한 범어배수지에 올랐다. 몇 해 전만 해도 그곳은 왁왁거리는 새소리로 가득했다. 올해도 배수지 앞 히말라야시더 나무에 그 새가 한가득 날아와 둥지를 짓고 있었다. 내 어릴 적 초등학교 강 건너편 산의 소나무에도 그 새가 하얗게 무리 지어 살았다. 사람들은 그 새를 학이라 했고, 산 아래 동네를 학마을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 새를 이범선의 '학마을 사람들'에서 만났다.

"옛날, 학마을에는 해마다 봄이 되면 한 쌍의 학이 찾아오곤 했었다. 언제부터 학이 이 마을을 찾아오기 시작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씨 뿌리기 시작할 바로 전에, 학은 꼭 찾아오곤 했었다. 그러고는 정해 두고 마을 한가운데 서 있는 노송(老松) 위에 집을 틀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노송을 학나무라고 불렀다."

학은 해마다 봄이면 찾아와 나무에 집을 짓고 논이나 개울에서 물고기 따위를 잡아 새끼를 키우고 가을이면 남쪽으로 날아갔다. 군집생활을 하는 이들은 늘 왁왁거리는 요란한 소리로 봄을 깨웠다. 이범선의 작품에서 마을 사람들은 학의 고락과 희비를 같이한다. 학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마을 사람들에게 광복이라는 희망을 갖다 주고, 이어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예견해주기도 한다. 학과 사람은 하나의 운명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였던 것이다.

"마지막 바퀴를 돌고 난 학들은 그리던 동그라미를 풀며 방향을 앞으로 잡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점이 하나씩 하나씩 남쪽 영마루를 넘어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한참이나 그대로 말없이 그 학들이 사라진 곳을 쏘아보고들 서 있었다."

'학마을 사람들'을 읽으면서 옛 시절이 떠올랐다. 봄과 여름을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가 가을에 떼를 지어 다시 남쪽으로 날아가는 새, 사실 그것은 학이 아니라 백로였다. 그러나 이전에 많은 사람들은 백로를 학으로 잘못 알고 학이라 했다. 여름 철새인 백로가 논이나 습지를 오가며 열심히 새끼를 키워내는 모습이 사람과 닮아있어 농부들은 동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아울러 해마다 봄을 싣고 오는 고고하고 신비하고 영험한 새로 간주했다.

내가 또 다른 진짜 학을 만난 것은 30여 년 전이다. 문산 근처에서 군생활을 할 때 나는 수많은 겨울 철새를 보았다. 겨울이면 부대 근처 논에 날아와 곡식 낟알을 주워 먹던, 머리에 빨간 점을 단 두루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황순원의 '학'에서 보여주는 단정학이 아니던가.

"둘이서 학을 마주 안아 공중에 후쳤다. 별안간 총소리가 들렸다. 학이 두서너 번 날갯짓을 하다가 그대로 내려왔다. 맞았구나. 그러나 다음 순간, 바로 옆 풀숲에서 펄럭 단정학 한 마리가 날개를 펴자, 땅에 내려앉았던 자기네 학도 긴 목을 뽑아 한 번 울음을 울더니 그대로 공중에 날아올라, 두 소년의 머리 위에 둥그러미를 그리며 저쪽 멀리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두 소년은 언제까지나 자기네 학이 사라진 푸른 하늘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성삼이와 덕재의 놀이 동무였던 새끼 단정학은 일제 사냥꾼의 총을 피해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들은 두루미의 탈출에 안도하였다. 성삼이가 좌익에 참여했던 소꿉친구 덕재를 학사냥을 핑계로 풀어준 것은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은 어린 시절의 순수세계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마침 단정학 두세 마리가 높푸른 가을하늘에 큰 날개를 펴고 유유히 날고 있었다"고 하는 대미는 평화와 자유를 구가하는 그들의 염원을 보여준다. 남과 북으로 유유히 날아가는 백로나 두루미처럼 우리는 언제 남과 북을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을까.김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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